<의용군행진곡>의
탄생 배경 및 국가 채택 과정
1931년에
일제는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3성을 침략 점령하였다.
1933년에 일본군이 다시 열하성(熱河省)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화북지역은 일제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전한(田漢: 티엔한)은 백색테러로 뒤덮인 상해(上海: 상하이)에 있었는데, 그는 국민당의 광폭적인
수사망을 피해 상해의 조계지로 이사하여 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음악계에서
어떤 작가들은 생사존망의 위험한 갈림길에서도 <너를 사랑해(妹妹我愛你:메이메이
워아이니)>·<도화강(桃花江: 타오화쟝)>·<이슬비(毛毛雨:마오마오
위)>
등과 같은 퇴폐적인 음악으로 인민의 혁명 의지를 타락시키고 있었고,
어떤 작가들은 태평스럽게도 현실투쟁과는 무관한 "예술가곡(藝術歌曲)"이라는
것을 써내고 있었다. 비록 몇몇 작가들이 구국적인 노래를 창작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사상 감정이 인민대중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폭넓게 유행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전한은 민중을 분기시키고 인민의 혁명투지를
고무시킬 수 있는 가곡을 구상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상해영화공사(上海電通影業公司)에서는 <풍운아녀(風雲兒女)>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항일구국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국민당 통치구의 지식인들이 고민과
방황 속에서 용감하게 항일전선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극본에서는 동북지역에서
상해로 흘러 들어온 두 청년의 운명을 묘사하고 있다. 한 청년은 항일투쟁에 투신하여
영웅적으로 희생되었고, 다른 한 청년은 타락에 빠졌지만, 곤궁한 여자 친구의 도움과
남자 친구의 희생적인 격려로 지난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마침내 항일전선으로
나아갔다.
이
영화의 내용은 원래 전한이 쓴 것인데, 그는 영화의 줄거리 설정에 따라 영화의
주인공이자 시인인 신백화(辛白華: 신바이화)가 창작한 장시 <만리장성(萬里長城:
완리창청)>을
위해,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 장성을 쌓자……(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
筑成我们新的长城! ……)"라는
최후의 시를 지었다. 그후 그것은 영화 <풍운아녀>의 주제가인 <의용군행진곡>의
가사가 되었다.
이때
전한은 백색테러의 박해로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이 가사는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담배갑 은종이 위에 쓰여졌다. 전한은 영화의 줄거리와 가사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 정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이 바로 적들의 총칼 앞에서 가슴 가득한 격정으로 쓴 것이
바로 이 전투적인 시편이다. 작곡자인 섭이(聂耳:
니에얼)의 처지도 전한과 마찬가지로
국민당의 위협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섭이는 당시에 상해의 다른 영화제작회사인
화련공사(華聯公司: 화롄꿍쓰)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미 국민당의 체포
영장을 받은 상태였다. 상해의 지하당 조직은 잠정적으로 섭이의 해외 도피를
결정해 놓았고, 그 자신도 이번 기회에 당분간 해외로 유학하여 음악을 더욱 깊이
연구할 것을 고려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출국전 짧은 기간 동안 전력을 다해 몇가지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의용군행진곡>은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섭이가
전한의 이 가사를 보고 곡을 쓸 때에, 그는 조국·인민·당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적에 대한 분개를 모두 하나 하나의 음표 속에 쏟아 넣었다. 그래서
곡의 전반적인 리듬은 우렁차고 힘이 있다.
1935년
7월, 전한이 남경(南京: 난징) 헌병사령부에서 출옥한 날에 <풍운아녀>는 개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해 7월 17일 섭이(당시 24세)는 일본 등택시(藤澤市) 곡소(鵠沼)
해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해에서
출판된 <<전통화보(電通畵報)>>에서 1935년 5월 16일 처음으로 <의용군행진곡>의
악보를 출간한 다음 그 음반을 제작하였다. 영화와 음반이 광고되면서 상해 도처에서는
<의용군행진곡>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그후 구국의 열기와 항일전쟁의
포화를 따라서 이 노래는 점차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강렬한 분노와 반항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1949년
9월 27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당시 세계적인 화가 서비홍(徐悲鴻:
쉬베이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채택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작사자 전한이 타도 대상이 되면서 이 노래의 가사는 일시적으로 불려지지 않았으며,
1978년 제5기 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는 <의용군행진곡>의 가사를 개사하기로
결정하였다.
1982년
2월, 헌법수정안을 토론할 때에 <의용군행진곡>의 가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82년 12월 4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회의에서
<의용군행진곡>은 중국의 국가로서 원래의 가사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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