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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고 대 문 학

고 대 시 가

초 사(楚 辭)

 

시경(詩經)이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북방문학인데 비하여 초사(楚辭)는 장강(長江)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남방문학이다. 초사는 전국시대 굴원(屈原)을 대표로 하는 초(楚)나라 사람들이 창작한 시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을 계승한 후대의 작품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되는데, 시기적으로는 한대(漢代) 초기까지를 그 범위에 넣을 수 있다.

"초사(楚辭)"의 개념은 한초에 생겨났으며, 한 성제(成帝) 때 유향(劉向)은 굴원과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책으로 편집하여 ≪초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최초의 ≪초사≫란 책은 동한(東漢) 왕일(王逸)이 지은 ≪초사장구(楚辭章句)≫이다.

초나라는 강회(江淮) 유역 일대에서 매우 일찍부터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은주(殷周)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서주(西周) 시대에 초나라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군사 정치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초나라의 패권 쟁취와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남북은 문화적 교류를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중원문화는 남방문화와 융합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게다가 초나라 지역에는 무풍(巫風)이 성행하여 신화전설이 풍부하였고 음악도 크게 발달하였다. "초사"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탄생되었다. 새로운 시체(詩體)로서 초사는 농후한 지역적 특색과 풍부한 상상력, 화미(華美)한 문채, 자유분방한 형식, 뚜렷한 종교적 색채, 신화전설의 대량 채용 등 남방문학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초사(楚辭)"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송나라 때 황백사(黃伯思)가 <익소서(翼騷序)>에서, "모든 작품이 초나라 말을 썼고, 초나라 곡조를 내었으며, 초나라 땅을 기록했고, 초나라의 물건 이름을 붙였으므로 이를 초사라고 불렀다."라고 한 것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초사"는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 창작되었으며, 그 내용 역시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개성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가로는 굴원(屈原), 송옥(宋玉), 경차(景差) 등이 있으며, 회남수산(淮南水山),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일(王逸) 등의 한대 작가도 있다.

≪초사장구≫에는 굴원의 <이소(離騷)>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父)>와 송옥의 <구변(九辯)> <초혼(招魂)>, 굴원 또는 경차가 지은 <대초(大招)> 이외에도, 한대의 가의(賈誼)의 <석서(惜誓)>, 회남수산의 <초은사(招隱士)>, 동방삭의 <칠간(七諫)>, 엄기(嚴忌)의 <애시명(哀時命)>, 왕포(王褒)의 <구회(九懷)>, 유향의 <구탄(九歎)>과 왕일의 <구사(九思)>가 들어 있다.

초사의 형식은 대체로 6언이 많고, 이 6언은 3언을 중복하여 사용한 것이다. 또 6언을 중복하여 1연을 이루는데, 1연의 중간에 "혜(兮)"자를 넣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구(造句) 방면에서도 6언이 많다고는 하지만, 시경에 비해서 그 형식이 매우 자유롭다.

 

1. 굴원(屈原)

 굴원(BC 339 ? ~ BC 278 ?)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그에 대한 사적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대략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굴원은 초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으로 몰락한 귀족 출신이며,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라 한다. 그는 일찍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매우 풍부한 학식과 큰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때는 좌도(左徒)를 역임하여 안으로는 국사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응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초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는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초나라의 부패한 귀족과 진나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던 초나라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尙), 자란(子蘭) 등과 진(秦)나라의 첩자 장의(張儀)의 참소와 농간으로 끝내 회왕(懷王)의 버림을 받아 추방당했다.

회왕 말년에 군사 외교적으로 실패한 후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였다. 그후 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경양왕(頃襄王) 때 굴원은 다시 간신들의 모함으로 강남으로 추방되었다. 이렇게 간신 무리에 의해 궁지로 내몰린 굴원은 초나라의 앞날과 임금을 생각하며 자신의 불운을 한없이 한탄하다가 결국 호남(湖南)의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약 200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위대한 애국시인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五節)에 용주(龍舟)를 젓고 쫑즈(子)를 먹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굴원에 대한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왕일의 ≪초사장구≫에 의하면 굴원의 작품은 <이소>, <구가>, <천문>, <구장>, <원유>, <복거>, <어부> 등 7편이 있다. 그러나 굴원이 지었다는 작품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이설이 있어 왔으며, 후세 사람들의 고증에 의거해 앞의 네 작품(<이소> < 구가> < 천문> <구장>)을 그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소>는 굴원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 것이고, <구가>는 고대의 무가(巫歌)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천문>은 그가 실의하여 산천을 방황하다가 하늘을 보고 탄식하며 부르짖은 노래이고, <구장>은 강남의 들로 쫓겨난 뒤 군왕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가>와 <천문> <구장>에 대해서는 완전한 굴원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따라서 ≪초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은 굴원의 <이소> 한편만 남는 셈이다.

 

2. 이소(離騷)

 위에서 언급한 굴원의 작품 중에서도 <이소>는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지는 작품이며, 373구 2490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대 중국의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이다.

"이소"의 "이(離)"는 "만나다, 멀리 떨어지다"는 뜻이고, "소(騷)"는 "불만, 울분"이라는 뜻이다. 이 시에서 굴원은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이상에 대한 추구, 부패한 현실에 대한 비판, 사악한 무리에 대한 원한을 강렬한 감정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훌륭한 인격과 진리를 견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불굴의 정신을 반영하였다.

예술 형식상에서 <이소>는 ≪시경≫ 이래로 정형화한 "4언체"의 제한을 타파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장단구(長短句) 형식을 채용하여, 풍부하면서도 기묘한 상상력으로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였으며, 대비와 과장을 통한 표현 기법의 운용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발휘하였다. <이소>의 출현으로 새로운 시체의 일종인 소체시(騷體詩)가 창조되었으며, 이러한 소체시는 매구마다 모두 "혜(兮)"자를 사용하여 특수한 리듬과 정서를 더해주고 있다.

 

3. 초사에 대한 의문

 초사는 그것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와 후세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전국시대의 문학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1) ≪사기≫의 「굴원가생열전」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절사편(節士篇)」에 실려 있는 굴원의 전기가 서로 모순되고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

2) 전국시대란 강호를 방황하는 사람이 그처럼 엄청난 개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고, 한대 이전에는 초사나 굴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전국시대 중엽에 굴원과 송옥의 작품 같은 뛰어난 문장이 있었다면, 그보다 분명히 뒤에 나왔고 부(賦)까지 지은 순자를 비롯하여 ≪한비자(韓非子)≫≪전국책(戰國策)≫≪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 그들의 문학에 관한 얘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3) 초사는 한대에 와서 유행하였던 것이고, 문체상 한부(漢賦)와 비슷하다.

4) 굴원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 학자도 나왔고, 또 굴원이 실제 인물이라 할지라도 기원전 300년을 전후하여 굴원에 의하여 초사라는 작품이 나왔으나, 그 후 100여년 동안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다가 한대에 와서 그러한 형식의 문학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청대 말기 요평(廖平)은 ≪초사강의(楚辭講義)≫에서 가장 먼저 굴원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하천행(何天行)은 ≪초사작어한대고(楚辭作於漢代考)≫에서 굴원을 완전히 부정, <이소>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유선시(遊仙詩)이고, 그밖의 작품들도 모두 한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고증하였다. 그뒤로 위취현(衛聚賢), 정적호(丁迪豪), 주동윤(朱東潤) 등이 하천행의 설에 동조하였다. 하천행과 주동윤의 고증은 상당한 근거가 있으나 그렇다고 굴원이 가설적인 인물임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설사 굴원이 전국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국시대의 문학으로서는 문학사상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것이므로 <한대의 문학>으로 <한부> 또는 <사부(辭賦)> 속에 ≪초사≫를 포함시켜 논하는 게 올바른 문학사의 방법"이며, 그렇게 해야만 "≪초사≫의 중국문학사상 의의나 가치도 더 뚜렷하고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 김학주 교수의 견해(≪중국고대문학사≫「중국문학사에 있어 초사의 문제」)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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