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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자와 제작연대
서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민간의 5언시와 악부에 기초를 두고 중국문학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면서 탄생한 고시십구수는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이 ≪문선(文選)» 권29 <잡시(雜詩)>
상(上)에
이를 고시19수라는 제목으로 수록하면서 그것의 작자를 무명씨로 하고 제작연대를
미상으로 한데 기인하여 그 후에 여러 학자들이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많은 학설을
내세웠으나 아직도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1)
작자
서릉은
≪옥대신영≫에서 소통이 무명씨로 선록한 고시19수 중 <서북유고루(西北有高樓)>,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 <섭강채부용(涉江採芙蓉)>, <청청하반초(靑靑河畔草)>, <정중유기수(庭中有奇樹)>(≪옥대신영≫에는
"中"이 "前"으로 되어 있음), <소소견우성(소소牽牛星)>, <명월하교교(明月何皎皎)>의
8수와 <난약생춘양(蘭若生春陽)> 시 1수를 합한 9수를 "매승잡시9수(枚乘雜詩九首)" 편에 수록하여
이후의 "매승작시설(枚乘作詩)"설을 유발시키는 근원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매승의
작시설은
종영(鍾嶸)의 ≪시품(詩品)≫과 당대 이선(李善)의 ≪문선주(文選注)≫에서 부정되었다.
결국 매승이 지었다는
이 시들은은 유협(劉협)의 지적처럼 성제(成帝) 때 수집한 가요에도 보이지 않으며, ≪한서(漢書)·매승전(枚乘傳)»과
<예문지·부략(藝文志·賦略)>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동방삭(東方朔) 등에게도 5언시는 없다. 또 서진(西晋) 초에 육기(陸機)가 이 9수를 모방
창작하였을 때에도
<의매승(擬枚乘)>이라 제목을 달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 보면
매승의 작시설은 거의 믿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고시19수의 작자는 역시 무명씨로
돌릴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은 어느 한 시대 한 사람에 쓰여진 것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2)
제작연대
고시십구수의
제작연대는 그것이 서한인지 동한인지로 나누어지는데, 서한이라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매승의 작시설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매승의 작시설이 일단 부정된
이상 그것을 서한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서한 시대에는 결코 성숙한 5언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시대적 관점과 19수의 내용이 한결같이 이별과 인생무상을 노래한
점을 보면 19수의 제작은 동한시대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명월교야광(明月皎夜光)>
시 중의 "옥형지맹동(玉衡指孟冬)" 구를 통한 연대 고찰이 쟁점이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고시19수는 동한 말 5언시가 성숙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혼란했던 정치 상황 아래에서
무명 작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2.
고시십구수의 내용
후한
화제(和帝, 89~105) 때는 한나라 흥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전의 3백여년 동안 한나라는
내부에 몇 차례의 소규모 반란이 있었으나 국세(國勢)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 한나라는 점차 쇠약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외척, 환관의 투쟁, 황건적의
난 등에 이어 계속되는 흉년과 전념병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안정을 잃고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 그들의 사상
또한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태어난 고시19수는 이별에
대한 애틋한 정, 혼란기의 염세적 사상에 의한 인생무상과 사회적 불만 등을 표출한
서정시의 걸작품이다.
그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 정빈우(鄭賓于)는 ① 사회를 묘사한 것, ② 부부 이별을 묘사한
것, ③ 남녀간의 연애를 묘사한 것, ④ 향락을 묘사한 것, ⑤ 인생의 인정을 묘사한
것으로 분류하였으며, 유대걸(劉大杰)은 ① 이별의 한과 향수를 묘사한 것, ② 어지러운 생활
속의 인생관을 묘사한 것으로 분류하였다.
3.
고시십구수의 문학적 가치
①
4언구가 주류를 이루어 오던 중국시의 흐름 속에서 5언이란 새로운 형식의 성공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②
고시19수의 출현은 한대 악부의 빛나는 성취이며, 건안(建安)문학에 튼튼한 주춧돌을 세워
당시(唐詩)로 발전하게 되는 중국시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③
소박하고 평범한 언어를 구사하여 뛰어난 서정성과 그 예술성을 발휘하였다.
④
시의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속에서 작자의 불만과 혼란한 사회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수가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작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불만과 원한은 단지 개인의 생활로부터 출발했는데, 그들은
두보(杜甫)와 백거이(白居易)처럼 결코 그들의 굶주리고 추운 절실한 체험을 일반 대중의 고통으로
넘어서게 하거나, 사회의 어두운 곳에 대한 철저한 폭로나, 백성을 대표하여 통치자에게
정면적으로 지탄하고 분노한 것이 없었다. 이것은 또한 이 방면에서 19수가 갖는
한계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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