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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고 대 문 학

고 대 시 가

시의 발전

 

시가의 발전은 자연적이면서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시가의 발전 과정 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주된 요소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대적 진보 :

인류의 생활방식이 끊임없이 개선되고 지식의 범위가 날로 광범위해지면서 시대적 진보도 그에 상응하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던 가요가 현실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그에 따른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시가는 그 시대에 맞는 사회 문화적 배경과 독특한 풍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정치적 제창 :

옛날에는 채시(采詩)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그것을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그러나 맹자에 이르러서는 "제왕의 업적이 소멸되자 시도 없어졌다.(王者之迹熄而詩亡.)"고 개탄하였다. 그 당시에는 시를 채집하던 제도가 이미 폐지되었으며 시를 배운 선비들은 평민처럼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漢)의 건국 이후 역대 군주들은 대부분 문학을 애호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시는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시부(詩賦)로써 관리를 등용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역대 과거에서 시와 산문을 함께 중시하면서 그 영향이 더욱 심원해졌다.

 

3) 인재배출 :

인재의 완성은 후천적인 교육과 양성에 의한 것이고 선천적인 조건은 조물주의 오묘한 조화에 의한 것이다. 당대에 이르러 시가 극도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열기를 고조시켰기 때문이다.

 

4) 음악의 발전 :

고대에는 시(詩)와 악(樂)이 하나였기 때문에 시가와 음악의 발전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대의 절구(絶句)는 대부분 가창할 수 있었기에 절구를 악부(樂府)로 삼았다.

 

상술한 네 가지 요소는 시의 발전을 끊임없이 촉진시켰으며, 발전 과정은 다시 시기, 지리, 구식(句式), 체재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시기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노래는 있었고, 요순시대에 시를 소리하는 것이 점차 시작되었으며, 서주 초기부터 춘추 중엽까지 찬란히 빛을 발하였다. 양한(兩漢)은 부(賦)의 시대였으며, 악부와 오언시가 함께 발전하였다. 시는 비록 많지 않지만 모두 천고의 절창이다. 한말 건안(建安) 시기에 이르러 작품이 많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변화도 번성하였다.

시는 당대에 이르러 발전이 절정에 달하고 체제별 형식도 모두 완비되어 중국문학사상 시의 황금시기를 열었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기교가 더욱 섬세해져 시의 변화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후의 시들은 당시의 유형에 속하지 않으면 송시의 유형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2) 지리

지리적으로 볼 때 시는 북에서 남으로 발전해갔다. <<시경>> 305편 중 국풍(國風)에는 초풍(楚風)이 없다. 비록 그 속에 강한(江漢)·형초(荊楚) 지방과 관계 있는 어휘가 여러 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원 사람들이 남방으로 내려가서 민요를 채집하거나 사건을 기술할 때 지은 것이지 결코 초(楚) 지방 현지의 노래가 아니다. 굴원(屈原)이 출현한 이후에야 비로소 남방문학이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고대에 사이(四夷)는 오랫동안 중원의 근심거리였다. 그들을 정벌하고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중원의 시가가 변경으로 유출되고 융적(戎狄)의 음악도 중원으로 유입되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영토확장과 종교의 전래는 모두 시가의 전파를 촉진시켰으며,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시가도 지역성을 탈피하여 어디는지 전파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3) 구식(句式)

상고시대에 전래된 가요 중에서 <단죽가(斷竹歌)>만 2언이고 그 나머지는 3언이나 4언, 5언 등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많아 정해진 체제가 없었다. 당시에 시의 구식은 자연스러움을 따랐을 뿐 규칙은 없었다.

<<시경>>의 구식도 1언에서 9언까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 중 4언이 가장 많고 5언이 그 다음이다. 지우(摯虞)의 <<문장유별론(文章流別論)>>에서는, "시가 비록 마음속의 생각을 근본으로 하지만 소리의 구성을 마디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범적인 음률은 4언이 정격이다. 그 나머지는 비록 복잡한 형식을 갖추었어도 그것은 올바른 음률이 아니다.(夫詩, 雖以情志爲本, 而以成聲爲節. 然則, 雅音之韻, 四言爲正. 其餘雖備曲折之體, 而非音之正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경>>의 구식은 4언을 정격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나머지 1언부터 9언까지의 각종 구식도 후세의 시가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4언을 뒤이어 5언이 성행하였다.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4언은 글귀는 간단하지만 의미가 폭넓어 <국풍>과 <이소>를 모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글귀가 복잡해지고 의미가 적을까 고심해야 했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것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적었다. 5언은 글귀의 요체를 가지고 있어 많은 작품들 속에 뛰어난 것이 있다.(夫四言文約意廣, 取效風騷, 便可多得. 每苦文繁而意少, 故世罕習焉. 五言居文詞之要, 是衆作之有滋味者也.)"라고 하였다. 심덕잠(沈德潛)은 <<고시원(古詩原)>>에서, "<국풍>과 <이소>가 쇠퇴하자 한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 5언을 표준으로 삼았다.(風騷旣息, 漢人代興, 五言爲標準矣.)"라고 하였다.

7언시는 건안(建安) 시기에 시작되었다. 한대의 시 중에도 무제(武帝)의 <추풍사(秋風辭)>, 장형(張衡)의 <사수시(四愁詩)> 등과 같은 7언구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초사의 변형으로 7언의 정격은 아니다. 무제의 <백량시(栢梁詩)>는 고염무(顧炎武)가 <<일지록(日知錄)>>에서 상세히 밝혔듯이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완전한 7언시는 조비(曹丕)의 <연가행(燕歌行)>이 최초의 작품이고, 그 다음이 포조(鮑照)의 <의행로난(擬行路難)>이다. 7언시는 양진(梁陳) 시기에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당대에 근체시의 발흥으로 크게 성행하였다. 왕국유(王國維)는 "4언이 쇠퇴하자 초사가 나타났고, 초사가 쇠퇴하자 5언시가 나타났으며, 5언시가 쇠퇴하자 7언시가 나타났다.(四言而有楚辭, 楚辭而有五言, 五言而有七言.)"라고 하였다. 대체로 싯구가 짧은 데서 길어지고, 문체가 질박함에서 화려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문학발전사상 필연적인 추세였다. 그리고 4언을 뒤이어 나타났던 각종 다른 구식들은 점점 도태되고 5언과 7언이 가장 알맞은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4) 체재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풍, 아, 송이 쇠망하자 일변하여 이소가 되고, 그것이 다시 또 변하여 서한의 5언시가 되었으며, 세 번째로 변하여 가행체가 되었고, 네 번째로 변하여 율시가 되었다.(風, 雅, 頌旣亡, 一變而爲離騷, 再變而爲西漢五言, 三變而爲歌行雜體, 四變而爲沈宋律詩.)"라고 하였다. 사실 초사의 탄생은 시경과는 직접적인 연원 관계가 없고, 한(漢)의 악부(樂府)는 오언고시와 같은 시기에 함께 일어났으다. 가행체는 악부를 모방한 변격으로 남조 초기에는 대구(對句)를 중시하고 제양(齊梁) 시기에는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이 유행하여 5언4구의 소악부와 5, 7언 단시(短詩)가 탄생되었으며, 당대에 이르러 점점 성숙한 근체시로 발전하였다. 예로부터 시의 체재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많았는데, 송대 엄우의 <<창랑시화>>, 명대 서사증(徐師曾)의 <<시체명변(詩體明辨)>> 등에서는 시대나 인물 또는 체재에 따라 분류하여 너무 번잡하였다.  <<문선(文選)>>에 수록된 고시도 체재에 따라 선별한 것이 있다. 여기에서는 처음 배우는 이들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악부, 고시, 근체시로 구분하여 간략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악부(樂府) :

한 무제가 악부라는 관청을 설치하기 이전에 한대 초기의 시가는 대부분 초사를 모방하였으나, 이연년(李延年)이 협률도위(協律都尉)가 된 후로 악부가 크게 흥성하였다. 악부관청에서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식의 시를 제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 맞출 수 있는 옛날 시가들을 수집하였다. 한 애제(哀帝)가 악부관청을 폐쇄한 이후에 문인들이 지은 시는 대부분 음악에 맞출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악부에는 창작과 모방의 구분이 있게 되었다. 한위(漢魏) 이래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 후세의 작품은 비록 악부를 제목으로 삼았지만 음악에 맞출 수 없는 것으로 실제로는 시와 차이가 없었다.

 

고시(古詩) :

4언은 시경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한대 초기 위맹(韋孟)의 풍간시(諷諫詩)를 최초의 4언시로 삼는다. 5언이 탄생된 이후 4언은 점점 쇠퇴하였다. 고시라는 이름은 시의 체제를 가리켜 한 말이지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문심조룡>> 「명시(明詩)」편에서는 "고시는 아름답다(古詩佳麗)"라고 하고, 계속하여 "5언(五言流調, 淸麗居宗)"이라 하였다. <<시품(詩品)>>에서는 "고시의 체는 원래 국풍에서 나왔다.(古詩, 其體原出於國風)"이라 하였다. <<문선>>에 수록된 19수의 시에도 고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위 이후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북조를 거쳐 풍격이 여러번 변하여 양진(梁陳) 시기에는 이미 고시의 모습을 점점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고시는 서한시기에 싹을 틔우고, 동한시기에 성장하여, 위진시기에 번성하였다가 제양시기에 쇠락하였다. 당대에 이르러 비록 복고풍이 유행하였지만 당송의 5, 7언고시도 독특한 풍격을 갖추었다.

 

근체시(近體詩)

시는 당대에 이르러 고체시와 근체시로 나누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는 근체시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것들은 모두 양진(梁陳)시기에 온양되어 당대에 성숙되기 시작하였다. 절구는 4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율시는 8구로 이루어져 있다. 율시는 절구 두수를 중복하여 조합한 것으로 가운데 4구는 반드시 대구를 맞추어야 한다. 평측과 음운은 모두 격식에 맞아야 하고, 각각 5언과 7언(즉 5언절구, 7언절구, 5언율시, 7언율시)이 있다. 절구에는 비록 6언도 있지만 송대 이후에는 점점 사라졌다.

 

(嘉英 <<詩學述要>>, 김덕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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