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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전해오는 시의 기원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생기면 노래소리가 흘러나온다.(哀樂之心感,
而歌詠之聲發.)"
심약(沈約)의
<<송서(宋書)>> :
"비록 순임금과
하(夏)나라
이전에는 남아있는 글이 없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천지의
원기와 영묘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 다스림이 없거나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인류가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雖虞夏以前, 遺文不睹,
稟氣懷靈, 理無或異, 然則, 歌詠所興, 宜自生民始也.)"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 :
"사람은
날 때부터 뜻을 가지며 그것은 노래소리에 담긴다.
삼황시대에 시작되어 <주남>과 <소남>으로 이어졌다.(民生而志,
詠歌所含, 興發皇世, 風流二南.)"
정현(鄭玄)의
<<시보(詩譜)>>「序)」:
"시가
시작된 것은 상고시대의 제왕 때가 아니다. 신농씨와
황제를
거쳐 제곡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시대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우며
전하는 문헌도 없다. <우서>에 이르기를, '시는
생각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읊은 것이며,
소리는 길게 읊는 것에 따라야 하고, 음률은 소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의
이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詩之興也,
諒不於上皇之世, 大庭, 軒轅, 逮於高辛, 其時有無,
載籍亦蔑云焉. 虞書曰: 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
然則, 詩之道, 昉於此乎?)"
공영달(孔潁達)의
<<모시정의(毛詩正義)>> :
"시의
기원은 하나는 민가이고, 다른 하나는 창작이다. 민가는 신농씨
때에 일어났고, 창작은 <요전>에서 시작되었다.(詩之起源,
一是謳歌, 一是造初, 謳歌起於大庭時, 造初則始於堯典.)"
이상의
각 설들을 종합하면, 반고와 심약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생겨난 때부터
노래가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유협은 복희씨
때 시작된 노래가 서주(西周)에 이르러 적극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정현은 시가를
요순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비교적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서(虞書)>>「요전(堯典)」에는
순임금이 기(夔)에게 음악을 관장토록 명령했다는 말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공영달은 민가가 염제(炎帝)
신농씨 때 이미 있었으며, 문자로 기록된 시가는 요순
때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문자가 없었을 때의 가요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있었을
것이나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규명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문자로 표현되어 음악을 동반한
시가는 요순 때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고대의
문헌에 의하면 요순 이전에도 이미 간단하면서도 소박한
시가가 전해지고 있었다. <<상서(尙書)>>는
「요전(堯典)」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것을 선사시대
시가라 칭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그것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
태호
복희씨 시대
<가변곡(駕辯曲)>.
[ <<초사(楚辭)>>「대초(大招)」]
<망고가(網罟歌)>.
[ <<수서(隋書)>>「악지(樂志)」]
*
염제
신농씨 시대
<풍년가(豊年歌)>.
[ <<하후현변(夏侯玄辯)>>「악론(樂論)」]
<갈천씨의
음악(葛天氏之樂)>. [ <<여씨춘추(呂氏春秋)>>「고악편(古樂篇)」]
<이기씨사사(伊耆氏蜡辭)>.
[ <<예기(禮記)>>「교(郊)」'특생(特牲)'
]
*
황제
헌원씨 시대
<도장가(渡漳歌)>.
[<<수경주(水經注)>>]
<단소요가(短簫요歌:
요=金+堯)>. [ <<한서(漢書)>>「예악지(禮樂志)」]
<단죽가(斷竹歌)>(탄가<彈歌>라고도 함). [
<<오월춘추(吳越春秋)>> ]
위에서
예를 든 시가 중에서 <이기씨사사>와 <단죽가>만
가사가 남아있고 나머지는 작품 제목만 남아있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을 가지고 그 뜻을 추측해 볼 때, <가변>,
<망고>, <풍년>은 분명히 수렵시대와 농경시대
초기 사회와 관계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고악편(古樂篇)」에 의하면 <갈천씨의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옛날
갈천씨(무위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상고시대의 제왕)의
음악은 세 사람이 소의 꼬리를 잡고 발을 내딛으며,
재민(載民), 현조(玄鳥), 수초목(遂草木), 분오곡(奮五穀),
경천상(敬天常), 달제공(達帝功), 의지덕(依地德),
총만물지극(總萬物之極)의 여덟 곡을 노래했다.(昔葛天氏之樂,
三人掺牛尾,
投足, 以歌八阕:
一曰載民, 二曰玄鳥, 三曰遂草木, 四曰奮五穀, 五曰敬天常,
六曰達帝功, 七曰依地德, 八曰總萬物之極.)"
갈천씨는
삼황시대 때의 제왕인데, 그 음악의 편명에 농업적인
색채가 아주 짙은 것으로 보아 그것을 신농씨의 시대라
유추할 수 있다. <도장가>와 <단소요가>는
황제와 치우(蚩尤)의 전쟁 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사용한 군악(軍樂)이라 생각된다. <이기씨사사>(사<蜡>는
연말에 만물의 여러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에 대해서
말하면, <<사기(史記)>>「오제기(五帝紀)」에서 요임금의 성을 이기(伊祁)라
하였고, 사사(蜡辭)는
당연히 요임금에게서 나온 것이니, 공영달(孔潁達)은
신농씨, 이기, 대정(大庭)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가사의 내용을 보면,
"흙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물은 자기 계곡으로 돌아가며,
곤충은 일어나지 않고, 초목은 자기 연못으로 돌아간다.(土反其宅,
水歸其壑, 昆蟲毋作, 草木歸其澤.)"
이
노래의 내용이 분명 농업사회의 축문이고, 신농씨가
처음으로 오곡을 심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공영달의
설을 따르기로 한다. <단죽가>는 <탄가(彈歌)>라고도
하는데, <<문심조룡(文心雕龍)>>「장구편(章句篇)」에서는
"2언은 황제 때에 시작되었으며 <죽탄(竹彈)>이란
가요가 그것이다.(尋二言肇於黃世, 竹彈之謠是也.)"라
하였고,「통변편(通變篇)」에서도, "황제
때의 노래 <단죽>은 지극히 질박하다.(黃歌斷竹,
質之質也.)"라 하였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월나라
왕이 오나라 정벌을 계획하려고 하자 범려가
활의 명수 진음을 추천하였다. 왕이 '그대가 활의 명수라
들었는데 그 재주가 어디서 나왔는가?'라고 묻자, 그는
'신이 듣기론 쇠뇌(弩)는 보통 활(弓)에서 나왔고,
보통 활은 탄알을 쏘는 활(彈)에서 나왔으며, 탄알을
쏘는 활은 옛날의 효자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부모님이
짐승에게 잡혀먹히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탄알을 쏘는 활을 만들어 부모님을 지켜드렸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越王欲謀伐吳, 范蠡進善射者陳音,
王問曰: 孤聞子善射, 道何所生? 對曰: 臣聞弩生於弓,
弓生於彈, 彈起於古之孝子, 不忍見父母爲禽獸所食,
故作彈以守之.)"
그
노래 가사에 이르기를, "대를 자르고, 대를 이어라,
흙을 날려서, 고기를 좇아라.(斷竹, 續竹, 飛土,
逐肉.)"라고 하였다. 아마도 황제 때에 이미 활과
화살이 있었으며, 탄알을 쏘는 활은 당연히 그보다
먼저인 것 같다. 그렇다면 <탄가(彈歌)>의 창작은
아마 황제 시기 이전일 것이다.
이상의
<사사>와 <탄가>는 가사의 내용이 대단히 질박한데,
엄격히 말하면 이것들은 모두 요언(謠諺)이라 할 수
있다. 반주없이 부르는 노래를 요(謠)라 하고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것을 언(諺)이라 하니 요언은 음악에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삼황시대에도 비록 노래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음악 반주를 구비한 노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요순
이래로 시가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현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선 서주 이전의 시가 여러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
요순 시기
<요계(堯戒)>
조심하고
조심하여, 하루종일 근신하라. 사람은 산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덕에서 넘어진다.(戰戰慄慄, 日謹一日.
人莫踬于山,
而踬于垤.)
[<<회남자(淮南子)>>]
<격양가(擊壤歌)>
해뜨면
나가 일하고, 해지면 들어와 쉰다. 우물 파서 물마시고,
논밭 갈아 밥먹는다. 이런 내게 왕의 힘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 [<<제왕세기(帝王世紀)>>]
<강구요(康衢謠)>
우리
백성들 편안함은, 모두다 그 분의 은덕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도에 순종한다.(立我蒸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열자(列子)>>]
<경운가(卿雲歌)>
곱게
핀 상서로운 구름, 뭉게뭉게 모여서, 햇빛과 달빛처럼,
영원히 빛나리라.(卿雲爛兮,
糾缦缦兮,
日月光華, 旦復旦兮.) [<<상서대전(尙書大傳)>>]
<남풍가(南風歌)>
남풍이
솔솔불어, 우리 백성들의 분노를 풀어주고, 남풍이
제때 불어, 우리 백성들의 재산을 늘려준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愠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공자가어(孔子家語)>>]
<명량가(明良歌)>
순임금이
노래불렀다. "수족 같은 신하들이 기뻐하면, 임금은
나라를 일으키고, 모든 관리들은 화락해지리라."
고요가 이어 노래하였다. "임금께서 현명하시면,
수족 같은 신하들도 훌륭해지고, 만사가 평안해질 것입니다."
다시 이어 노래하였다. "임금께서 좀스러우시면,
수족 같은 신하들이 게을러져, 만사가 망쳐질 것입니다."(帝歌曰:
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熙哉. 皐陶赓歌曰:
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 又歌曰: 元首叢脞哉,
股肱隋哉, 萬事墮哉.) [ <<상서(尙書)>>「익직(益稷)」]
*
하상(夏商) 시기
<오자지가(五子之歌)>
태강이
나라를 잃자 그의 다섯 아우는 형을 원망하면서 우임금의
훈계를 서술하여 노래 5곡을 불렀다. 여기서는 그 중
다섯 번째 곡을 소개한다.
아아 어디로 돌아갈까,
슬픈 내 마음이여. 만백성이 원수로
여기니, 누구를 의지할까. 울적한
내 마음이여. 철면피도 수치를 아는 법. 그분의
덕을 잘 받들지 못했으니, 뉘우친들 되돌릴 수 있을건가.(嗚呼曷歸! 予懷之悲,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忸怩,
弗愼厥德, 雖悔可追!) [ <<상서(尙書)>>「하서(夏書)」]
<채미가(采薇歌)>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캔다. 폭력으로 폭력을 물리치고도,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염제와 순임금, 우임금의 도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난 어디로 돌아갈까. 아아 가야겠구나,
운명이 다하였으니.(登彼西山,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吾適安歸矣. 吁嗟徂兮,
命之衰矣.) [ <<사기(史記)>>「백이열전(伯夷列傳)」]
<맥수가(麥秀歌)>
보리가
쑥쑥 패어나고, 벼와 기장도 무성해졌건만, 저 미치광이는,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는구나.(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채미가>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지은 것이고, <맥수가>는
기자(箕子)가 지은 것이다. 백이 숙제와 기자는 모두
은(상)나라의 유민이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하였다.
복희씨로부터
은(상)나라까지 약 2천여년간 후세에 전해진 시가는
얼마 되지 않고, 요순시대의 시가도 대부분 <<제왕세기>>나
<<상서대전>> <공자가어>>등과
같은 위서(僞書)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시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시경(詩經)>>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경>>의 찬란한 성과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서주
이전의 시가는 애석하게도 짧막짤막하게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만약 위조한 것이라면 이 정도로 적게
남아 있지는 것이다. 요순 이전의 시가들이 상실된
것은 아마도 홍수와 관계 있을 것이다. <<맹자(孟子)>>「등문공(滕文公)」상편에서는, "요임금 때에도 천하는 평온하지
않아 홍수가 마구 흘러넘쳐 천하를 뒤덮었다.(當堯之時,
天下猶未平, 洪水橫流, 氾濫于天下.)"라 하였고,
<<상서(尙書)>>「요전(堯典)」에서는, "홍수가
출렁출렁 천지를 뒤덮고, 망망한 물줄기가 산과 언덕을
덮쳐, 그 거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湯湯洪水方割,
蕩蕩懷山襄陵, 浩浩滔天.)"라 하였다. 이러한
홍수로 인해 상고시대의 문물은 거의 대부분 파손되었을
것이다. 요순 이후의 시가는 고대음악의 망실과 관계있을
것이다. 시를 음악에 맞추어 지으면서 시와 음악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음악이 망실되자
시가도 자연히 그와 함께 소멸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시의 기원에 대해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어떤 민족의 문화 속에서도 운문의 기원이 산문보다
빠르고, 민간가요가 운문의 기원이 되고 있다. 새나
개구리 울음소리는 그 자체가 자연의 음악이기 때문에
시가는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2.
복희 시대부터 상대(商代)에 이르기까지 고대 악기가
이미 발달하였으니 시가도 많았을 것이다. 홍수의 재난으로
고대 음악이 망실되었기 때문에 서주 이전의 시가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3.
선조들이 물려준 소수의 시가들은 각별히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원래는 구전되어 왔던 까닭에 어투가
질박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의 윤식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섣불리 위조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4.
요순 시대에는 조금씩 시를 노래하기 시작하였고, 서주
초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발전하여 찬란히 빛을 발했다.
<<시경>>이 역사적 사실을 갖춘 시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기나긴
역사적 흐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기원은 그 유래가 유구하다고 하는 것이다.
(龚嘉英
<<詩學述要>>, 김덕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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