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verside_home.gif Home  l  Site Map  l 사이트소개 l  추천사이트 l

 

 

 

 

 

 

 

 

 

 

 

 

 

 

 

 

 

 

 

 

 

 

 

 

 

 

 

 

 

 

 

 

 

 

 

 

 

 

 

 

 

 

 

 

 

 

 

 

 

 

 

 

 

 

 

 

 

 

 

 

 

 

 

 

 

 

 

 

 

 

 

 

 

 

 

 

 

 

 

 

 

 

 

 

 

 

 

 

 

 

 

 

 

 

 

 

 

 

 

 

 

 

 

 

 

 

 

 

 

 

 

 

 

 

 

 

 

 

 

 

 

 

 

중 국 고 대 문 학

고 대 시 가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이란 중당(中唐) 시기에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稹)이 신제악부시(新題樂府詩)를 창작하자고 주장한 시가혁신운동이다.

신악부는 당대(唐代) 시인들이 스스로 신제(新題)를 세워 지은 악부시(樂府詩)를 가리킨다.  송대(宋代) 곽무천(郭茂倩)은 ≪악부시집(樂府詩集)≫에서, "신악부란 모두 당대의 새로운 노래이다. 그 가사의 내용은 악부였지만 그것을 음악에 맞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악부라 하였던 것이다.(新樂府者, 皆唐世之新歌也. 以其辭實樂府, 而未嘗被于聲, 故曰新樂府也.)"라고 지적하였다. 명대(明代) 호진형(胡震亨)은 ≪당음계첨(唐音癸簽)≫에서, "악부에는 또 왕제(往題)와 신제(新題)의 구별이 있다. 왕제란 한·위(漢魏) 이후 진·수(陳隋) 이전의 악부고제(樂府古題)를 당대 시인들이 모방하여 지은 것이고, 신제란 고악부에는 없던 것으로  당대 시인들이 악부의 제목을 새로 창작한 것이다.(樂府內又有往題新題之別. 往題者, 漢魏以下, 陳隋以上樂府古題, 唐人所擬作也. 新題者, 古樂府所無, 唐人新制爲樂府題者也.)"라고 하였다.

 

악부(樂府)는 원래 음악기관의 명칭이었으나 나중에는 음악에 맞출 수 있는 시의 명칭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악부시는 위진(魏晋) 시기에 이미 "옛 병에 새 술을 담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사람들은 옛날의 악부시 제목을 채용하여 현실사회의 시사(時事)를 묘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대(漢代)의 악부에 대해서 말하면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었다. 예컨대 조조(曹操)는 "호리행(蒿里行: 장례 때의 만가 挽歌)"이란 고악부(古樂府)의 제목을 사용하여 동한(東漢) 말기 군벌의 혼전으로 조성된 재난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분명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라는 모순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악부시체의 새로운 변화였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초당(初唐) 시인들의 악부시도 대부분 악부의 옛 제목을 습용하였으나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새로운 제목을 세워서 지은 것도 있었다. 이러한 신제악부(新題樂府)는 두보(杜甫)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두보는 악부시체를 운용하여 시사(時事)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는데, 그는 옛 제목의 속박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시에 묘사된 현실적인 내용에 근거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그의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비진도(悲陳陶)>, <애강두(哀江頭)> 등은 모두 사실적 내용을 근거로 제목을 세운 즉사(卽事)의 명편으로 더 이상 옛 제목을 모방하지 않았다.  

두보의 이러한 창작 원칙은 중당(中唐) 시기에 원결(元結), 위응물(韋應物), 대숙륜(戴叔倫), 고황(顧況)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원결은 시가를 창작함에서 있어서 반드시 "난세를 다스리는 제왕의 도리를 다하고, 시사를 풍간한 고인의 유풍을 이어받아(≪이풍시론(二風詩論)≫: 極帝王理亂之道, 系古人規諷之流)" "위로는 황제를 감동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시켜야 한다.(신악부서≪新樂府序≫: 上感于上, 下化于下)"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신악부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악부운동은 정원(貞元), 원화(元和) 연간이라는 특정한 시대 조건의 산물이었다. 당시 당왕조는 안사(安史)의 난을 거친 후 이미 쇠락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번진(藩鎭: 지방군벌)의 할거, 환관의 전횡, 과중한 조세, 빈부격차의 심화, 이민족의 침입과 빈번한 전란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계층 중 일부 지식인들이 현실적 폐단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치개혁과 사회안정을 통한 당왕조의 부흥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문단과 시단에 그대로 반영되어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을 중심으로 한 고문운동(古文運動)과  백거이, 원진을 중심으로 한 신악부운동으로 나타났다.

원화 4년(809) 먼저 이신(李紳)이 <신제악부(新題樂府)> 20수(지금은 망실되었음)를 지어 원진에게 주었으며, 원진은 그것을  읽어 보고 대단히 높게 평가한 후 <화이교서신제악부(和李校書新題樂府)> 12수를 지어 그에 화답하였다. 그 후 백거이는 <신악부(新樂府)> 50수를 지어 정식으로 "신악부"라는 명칭을 표방하였으며,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진중음(秦中吟)> 10수를 지어 신악부운동의 정신을 선양하였다. 신악부는 시가운동으로 그 창작 범위는 결코 신제악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장적(張籍), 왕건(王建), 유맹(劉猛), 이여(李餘) 등은 신제악부도 짓고 고제악부(古題樂府)도 지어 시가혁신의 방향을 구현하였다. 원진은 원래 백거이, 이신과 "다시는 고제(古題)를 모방하지 말자"고 약속하였으나, 나중에 유맹과 이여의 고악부시를 보고 "그 중 1~20장에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고 느끼고는 고제악부 19수를 지어 그에 화답하기도 하였다. 원진이 비록 고제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진부한 의미가 전혀 없는 새로운 말로 창작되어 실질과 효용면에서 신악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시가운동의 국면이 형성되었으며, 중국문학사에서는 그것을 신악부운동이라 일컫는다.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 <신악부서(新樂府序)>, <기당생(寄唐生)>, <상당구(傷唐衢)>, <독장적고악부(讀張籍古樂府)> 등의 시문에서, 원진은 <화이교서신제악부(和李校書新題樂府)>, <악부고제서(樂府古題序)> 등의 시문에서, 신악부운동의 이론적 주장을 전개하였다.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여원구서>: 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 "임금과 신하, 백성, 사물, 시사를 위해서 지어야지 문체를 위해 지어서는 안된다.(<신악부서>: 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昨, 不爲文而作.)"는 주장을 통해서 신악부운동의 근본적인 취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사람들의 병폐를 구제하고 시대적 폐단을 보완해야 한다.(<여원구서>: 救濟人病, 裨補時闕.)", "위로는 시정을 살피고 아래로는 인심을 이끌어야 한다.(<여원구서>: 上以補察時政, 下以泄導人情.)"  "풍, 아, 비, 흥 외에 헛된 글을 지은 적이 없다.(<독장적고악부>: 風牙比興外, 未嘗著空文.)"는 주장을 통해서 시가의 사회적 효용과 풍유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오직 백성들의 병과 고통을 슬퍼한다.(<상당구>: 但傷民病痛.)" "그 시대의 일을 풍자한다.(<악부고제서>: 諷興當時之事.)" 는 주장을 통해서 "풍설과 화초를 지으며 즐겁게 노는 것(<여원구서>: 嘲風雪, 弄花草.)"을 반대하고, 시가란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민생의 질고와 사회현실의 폐단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을 뿌리로 삼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뜻을 열매로 삼는다.(<여원구서>: 根情, 苗言, 華聲, 實義.)" "그 문사는 질박하고 직설적이며, 그 말은 곧고 절실하며, 그 내용은 자세히 조사하여 진실된 것이고, 그 체재는 부드럽고 자유롭다.(<신악부서>: 其辭質而徑, … 其言直而切, … 其事覈而實, … 其體順而肆.)" "음률의 뛰어남을 추구하지 않고 문자의 기묘함에 힘쓰지 않았다.(<기당생>: 非求宮律高, 不務文字奇.)"에서는 시가의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되 내용에 힘을 기울이고 앞뒤 문맥이 잘 통하게 표현하여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가이론은 대력(大曆) 이래로 점차 대두되어 온 현실 도피적 시풍과는 반대로, ≪시경(詩經)≫, 한악부(漢樂府)와 두보 이후의 우수한 시가 전통을 발양시킨 것으로 진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악부운동은 시가의 창작면에서 이상의 이론적 주장을 실천으로 옮기는 운동이었다. 백거이, 원진, 장적, 완건 등은 악부시와 기타 작품들 속에 중당(中唐) 시기의 광범위한 사회 생활을 반영하면서, 당시에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을 다방면으로 폭로하여 사회적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백거이의 <두릉수(杜陵叟)>, <매탄옹(賣炭翁)>, 원진의 <전가사(田家詞)>, <직부사(織婦詞)>, 장적의 <야로가(野老歌)>, 왕건의 <수부요(水夫謠)> 등에서는 모두 갖은 착취와 압박 속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비참한 운명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백거이의 <요릉(繚綾)>, <홍선담(紅線毯)>, <중부(重賦)>, <경비(輕肥)> 등에서는 통치계층의 방탕하고 황음무도한 생활을 직접 질책하고, 그 속에 빈부격차의 심화와 계층간의 갈등을 반영하였다. 백거이의 <숙자각산북촌(宿紫閣山北村)>, 장적의 <맹호행(猛虎行)>, 왕건의 <우림행(羽林行)> 등에서는 잔악한 특권계층이 백성을 탄압하는 온갖 만행을 폭로하였다. 백거이의 <신풍절비옹(新豊折臂翁)>, 원진의 <부원정(夫遠征)>, 장적의 <새하곡(塞下曲)>, 왕건의 <도요수(渡遼水)> 등에서는 변방 병사들의 고통과 전쟁 반대 사상을 반영하였다. 백거이의 <염상부(鹽商婦), 원진의 <고객악(估客樂)>, 장적의 <賈客樂)> 등에서는 당시 상업 경제의 기형적인 발전, 부유한 상인과 가난한 농민 사이의 갈등을 반영하였다. 백거이의 <상양인(上陽人)>, <정저인은병(井底引銀甁)>, 장적의 <첩박명(妾薄命)>, 왕건의 <망부석(望夫石), <거부(去婦)> 등에서는 부녀자들의 불행안 운명을 동정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강렬한 현실적 의의와 선명한 경향성을 갖추고 있다. 예술적인 면에서는 비록 각자의 성취와 풍격은 다르지만, 대체로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명쾌하고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신악부운동으로 나타난 성과이다.

신악부운동을 통해 창작된 현실을 풍자하고 시대적 폐단을 질책한 작품들은 당연히 많은 권세가들의 비위를 거슬렸다. 백거이의 시를 보고 "고관대작들은 서로 눈짓하며 파랗게 질렸고, 집정자들은 팔을 걷어부치고 분격하였으며, 병권을 잡은 사람들은 이를 갈았다.(<여원구서>: 權豪貴近者相目而變色, … 執政柄者扼腕, … 握軍要者切齒.)"

원화 10년 백거이는 갖은 비방과 모함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강주(江州)로 좌천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악부운동도 그 기세가 꺾였다. 실제로 통치계층과 현실정치의 부정부패로 신악부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중국시가사상 찬란한 한 페이지를 수놓고 후세의 시가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 현재 페이지는 [언어문학] - [고대시가] - [신악부운동] 입니다. ◈◈◈

l 중국문학과 그 특징 l 시의 의미 l 시의 기원 l 시의 가치 l 시의발전 l 시경 l

초사사부 악부 l 오언시 발생고시십구수건안문학좌사와 영사시 l

l 백거이와 그의시진중음10수신악부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