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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가무의 영향]

2. [설창예술-희곡발전의 문학적 토양]

3. [희극의 결실]

 

 

 

 

 

 

 

 

 

 

 

 

 

 

 

 

 

 

 

 

 

 

 

 

 

 

 

 

 

 

 

 

 

 

 

 

 

 

 

 

 

 

 

 

 

 

 

 

 

 

 

 

 

 

 

 

 

 

 

 

 

 

 

 

 

 

 

 

 

 

 

 

 

 

 

 

 

 

 

 

 

 

 

 

 

 

 

 

 

 

 

 

 

 

 

 

 

 

 

 

 

 

 

 

 

 

 

 

 

 

 

 

 

 

 

 

 

 

 

 

 

 

 

 

 

 

 

 

중 국 고 대 문 학

고 대 희 곡

민간문예에서 배양된 중국희곡

 

 

1. [고대가무의 영향]       2. [설창예술 - 희곡발전의 문학적 토양]

3. [희극의 결실]

 

    [고대가무의 영향]

 

1. 최초의 기원은 원시가무

많은 고대문물과 고문헌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원시가무(原始歌舞)가 고대인들의 경축행사의 주요 내용이며, 그것이 씨족집단의 채집, 수렵, 어로(漁撈), 사육, 농경, 전쟁생활과 남녀간의 사랑을 재현한 것인 동시에 천지, 신령, 토템에 대한 경외(敬畏) 및 생식에 대한 숭배를 표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무는 처음에는 정서를 해소하고 축원을 바라는 고대인들의 심리 관념과 함께 결합되어 씨족집단 속에서 신에게 제사지내고 신을 위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의 발생학적 측면에서 보면 고대인들이 창조한 이러한 가무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다.

1) 생활에 대한 재현 : 표현 대상을 모방하여 연출한 것은 원시적인 공연예술에 속하는 것이다.

2) 가창, 가무(동작), 기악(석기 등)이 함께 결합되었다.

3) 신에게 제사지내고 신을 위로하는 의식성(儀式性)과 심미를 추구하고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관상성(觀賞性)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술에 취하고 미친 듯한 상태 속에, 그리고 상징적이고 모방적인 동작 속에 이미 희극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바로 원시 공연예술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귀신으로 분장한 무나(巫儺)

최초의 가무는 모두 집단적인 가무였으며, 이후에 여기에서 가무를 전담하는 사람이 분화되어 나왔다. 이렇게 가무에 특별히 뛰어나서 전문적으로 가무를 담당한 사람을 여자는 무(巫), 남자는 격(覡)이라 칭하였다. 은상(殷商) 시대의 갑골문 복사(卜辭)에 보이는 "무(巫)"자는 한 사람이 양손에 소의 꼬리를 쥐고 있는 형상을 묘사한 상형문자이다. 이것은 "무(巫)"가 춤추는 사람들(舞者) 속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임을 의미한다. 무격(巫覡)은 제사와 춤을 주관하면서 귀신으로 분장하여 신기를 펼치는데, 고대인들은 그들이 위로는 사람들의 기원을 전해주고 아래로는 신의 뜻을 전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씨족부락과 노예사회의 신권(神權), 족권(族權) 통치하에서 무격은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니, 그들은 최초의 가무 예술가인 동시에 교사였던 것이다.

귀신으로 분장하여 손발을 흔들며 춤춘 그러한 무리들을 절대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전문적인 분장가로서 복장과 동작, 외모에서 모두 귀신의 모습을 모방하여 귀신으로 분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장에 바로 희극의 맹아가 나타나 있다. 희극은 어떤 인물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연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희극에 노래나 춤은 없어도 되지만 분장은 절대 없어서는 안된다. 일반적으로 중국희곡이 노래와 춤을 동반한 예술이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가무를 전달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분장 연기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무격의 활약상이 사람들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시인 굴원(屈原)이 창작한 <구가(九歌)>의 내용을 통해서 노래와 춤을 동반한 제례의식의 성행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어떤 단락은 각종 신들의 어투로 묘사되었는데,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남자 무당이나 여자 무당이 각각 그 역할을 분담하여 그들이 역할을 맡은 신의 신분으로 노래해야 한다. 무격의 분장은 격렬한 가무를 동반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무가 바로 희극을 향한 첫 걸음마였던 것이다.

 

3. 우맹의관(優孟衣冠)

춘추시기(BC722~BC481)에는 다시 고대의 무(巫)에서 "우(優)"가 분화되어 나왔다. 우(優)는 가무, 해학, 음악, 잡기 등을 내세워 제왕을 측근에서 모셨다. 즉 그들은 귀신이 아닌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우(優)는 악인(樂人)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그들은 노래와 춤은 물론 우스꽝스런 익살에도 능하였다. 재담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을 배우(俳優)라 하고, 기악 연주에 뛰어난 사람을 영우(伶優)라 한다. 임금을 모시는 특수한 여건을 기반으로 우(優)는 언제나 웃기는 이야기와 함축적인 말 속에 풍자의 기지를 발휘하곤 하였다.

우맹(優孟)은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을 실제와 똑같이 연기하여 군왕의 마음을 돌려놓았으니, 그는 바로 희극적인 방식으로 정사에 임했던 것이다. "우맹의관(優孟衣冠)"은 후에 연극의 대명사가 되었다. 비록 그것을 진정한 희극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인물의 배역과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표현 양식의 일종으로 희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의 해학적이고 익살스런 언어 예술은 후세의 희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4. 각저희(角抵戱)

한대(漢代)에는 "백희(百戱, 궁정의 아악 雅樂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산악 散樂이라고도 함)"가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실제로 한대의 민간가무, 잡기, 무술, 마술의 총칭이었다. 한 무제(武帝) 때에는 악부(樂府)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민간가요를 수집함으로써 악무(樂舞)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비단길의 개척도 중원과 서역의 문화교류와 각 민족 예술의 융합을 촉진시켰다. 이에 백희의 공연은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게 되어 궁정에서도 대규모의 백희 공연 행사를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백희 중에는 기예를 운용한 희극적인 공연 항목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각저희(角抵戱)이다. 각저(角抵)는 원래 두 사람이 힘을 겨루어 승부를 결정짓던 씨름의 일종이었다. 후세의 상박(相撲: 씨름의 일종)이나 솔교(摔跤: 씨름의 일종)는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것은 아주 좋은 구경거리로 풍부한 오락성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의 예인(藝人)들은 각저의 기예로써 일상적인 생활을 표현하려고 힘썼으며, 이러한 노력이 각저를 희극으로 변모시켜 각저희를 탄생시켰다.

≪동해황공(東海黃公)≫에 이르러서는 인물, 줄거리, 갈등, 결말 등의 구성 요건을 갖춤으로써 그것은 이미 두 사람이 맞붙어 힘으로 승부를 겨루던 각저 경기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해진 이야기의 내용을 표현하는 희극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희극 연구가들은 당연히 ≪동해황공≫을 중국희곡의 추형으로, 백희의 공연을 중국희곡을 배양한 요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5. 유명한 당대 가무희 3종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 중원대륙은 수많은 전쟁과 사회적 혼란을 거쳤지만, 각 민족간의 치열한 정치적 충돌은 오히려 상호간의 문화적 융합을 촉진시켰다. 수대에는 국내외의 악무(樂舞)를 종합한 "구부악(九部樂)"이 출현하였고 당대에는 그것이 십부악(十部樂)으로 늘어났으니, 이 시기에 가무가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민간예술의 영향을 서서히 받으면서 가무는 희극을 향하여 더욱 더 한 걸음 바싹 다가갔다.

서역에서 유입된 ≪발두(撥頭)≫는 어떤 서역인이 호랑이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구하러 산속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고 호랑이를 잡아죽인다는 내용이다. 산은 여덟 굽이이고 가곡도 여덟 첩(疊)이다. 연기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소복을 입고 울부짖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동해황공≫에 비해 가곡이 훨씬 더 많다.

≪답요낭(踏搖娘)≫은 소중랑(蘇中郞)이라는 사람이 술에 푹 빠져 취하기만 하면 아내를 구타한다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소중랑의 아내는 노래를 잘하였기에 그녀는 노랫소리를 빌어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슴속 깊이 서려있는 슬픔과 원한을 하소연하였으며, 그녀가 걸어가면서 노래하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화답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가무희 3종인 ≪난릉왕(蘭陵王)≫, ≪발두≫, ≪답요낭≫은 모두 간단하지만 완전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고, 인물과 갈등 구조도 가지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답요낭≫에서 연기자는 창(唱), 념(念), 주(做, 예를 들면 소중랑의 아내가 슬피 울며 하소연하는 것), 타(打, 예를 들면 소중랑이 취하여 귀가한 후 아내와 싸우면서 때리는 것)의 표현 수단을 동원하여 가무로써 고사를 연출하는 예술형식을 구성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상징적인 동작도 표현방법의 하나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배우들은 각종 의상과 장식을 이용하여 자신이 맡은 배역으로 분장하였다. 즉 소중랑은 검은 모자에 붉은 옷을 입고 빨간 가면을 사용하였으며, 소중랑의 아내는 남자 배우가 배역을 맡아 여자 옷을 입고 여자로 분장하였다. 이렇게 남자 배역 한 명과 여자 배역 한 명으로 구성된 것은 부정(副淨: 조연자)과 단(旦: 여주인공)으로 이루어진 후세의 소희(小戱)와 비슷하다. 당시에 "항당(行當: 배역의 종류)"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분장을 한 것을 보면 이미 항당의 추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참군희(參軍戱)의 영향

당대에는 가무희가 번성한 것 외에도 참군희(參軍戱)가 흥기하였으니, 그것은 배우가 연기하는 우희(優戱)를 토대로 발전하였다. 참군희라는 명칭은 죄를 범한 한 관리에게서 나왔는데, 그의 직업이 원래 참군(參軍: 임금, 재상 또는 장군의 군사 막료)이었기 때문에 참군희라 하였다. 실제 공연 속에서 "참군"이라는 말은 이미 관직의 의미를 벗어나서 각색(角色: 배역)의 명칭으로 변화되어 하나의 고정된 격식을 구성하고 있었다. 즉 두 명의 연기자가 익살과 풍자를 위주로 한 문답을 펼치면서, 대사와 동작은 물론 노래와 음악 반주도 가미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참군이라는 인물은 풍자의 대상으로 비교적 우둔하다. 이 참군을 놀리는 사람을 창골(蒼)이라 하며 비교적 영리하고 재기가 흘러 넘친다. 참군과 창골은 모두 극중 인물로 분장한 각색의 명칭이므로 실제로는 여기에서 이미 "항당"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희곡에서 각색과 항당의 구분은 바로 이 참군희에서 비롯된 것이다. 많은 희극 연구가들은 "참군"이라는 이 각색이 바로 후세 희곡 중의 정각(淨角: 성격이 강렬하거나 거친 남자 배역)에 해당되고, "창골"이라는 이 각색이 바로 축각(丑角: 어릿광대역)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당대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그의 시 <교아(驕兒)>에서 "문득 다시 참군을 배우고, 소리를 가다듬어 창골을 부른다.(忽復學參軍, 按聲喚蒼鶻)"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만당(晩唐) 시기에는 놀이를 즐기던 아이들까지도 정해진 항당에 따라 참군희를 모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군희와 가무희는 밀접한 관계로 상호간에 신속히 스며들어 향후 형성될 중국희곡을 위하여 노래와 춤, 대사, 동작, 연기를 하나로 융합하는 기본적인 골격을 마련해 주었다.

 

1. [고대가무의 영향]       2. [설창예술 - 희곡발전의 문학적 토양]

3. [희극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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