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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의 결실]
12세기 송대(宋代)에 이르러 중국희극은 길고도 완만한 배양 기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장협장원(張協狀元)≫을 대표로 하는 남희(南戱)는 바로 고급 희극형태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1. 희극에 아주 근접한 송금(宋金) 잡극(雜劇) 송대에는 도시생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대에는 수도에 야간 통행금지를 시행하였으나 송대에는 그것을 해제하여 밤새 시장이 북적거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밤에도 마음껏 오락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는 번화한 도시에서 시민들의 문화오락에 대한 욕구는 구란(勾欄: 또는 와붕 瓦棚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는 고정된 공연 장소의 출현을 재촉하였다. 구란은 지금의 연예장과 같은 것이다. 구란에서 공연된 다양한 백희(百戱)는 희극의 완전한 종합체로서 유익한 사회적 환경과 풍부한 예술적 양분을 창출하였다. 송대에는 고대의 우(優)의 전통과 참군희의 성과를 계승한 위에 기타 가무 기예를 흡수하여 송잡극(宋雜劇)이 형성되었다. 현존하는 문헌을 통해서 송잡극의 공연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희(戱)는 일반적으로 1장(場) 3단(段)이나 2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제1단 염단(艶段)에서는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를 공연하고, 제2단 정잡극(正雜劇)에서는 내용이 비교적 복잡한 이야기를 공연하며, 제3단 산단(散段)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공연한다. 송잡극에는 이미 4~5명의 배우가 있었다. 그 중 "말니(末泥)"와 "인희(引戱)"는 주로 공연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부정(副淨)과 부말(副末)은 참군과 창골의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또 여자 배역을 연기하는 인물을 "장단(裝旦)"이라 하였고, 전문적으로 관리 역을 연기하는 인물을 "고(孤)"라 하였다. 송나라와 금나라가 대치한 이후 송잡극은 금왕조가 통치하던 북방으로 전래되어 금원본(金院本) 또는 통칭하여 송금잡극(宋金雜劇)이라 일컬어졌다. 송금잡극의 극본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이 없고, 다만 잡극의 제목 280개와 원본의 제목 690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중에는 ≪안약산(眼藥酸)≫처럼 해학적인 극목도 있고, ≪상여문군(相如文君)≫, ≪왕종도휴처(王宗道休妻)≫처럼 인물이나 고사로써 제목을 삼은 것도 있으며, ≪최호육요(崔護六么)≫처럼 인물고사의 제목에 곡명을 덧붙인 것도 있다.(최호는 인명이고 육요는 곡명임) 이러한 극목의 명칭을 통해서 송금잡극 역시 서사적인 이야기를 위주로 한 가무이며 그 사이에 대언체(代言體)에 속하는 희극적인 연기(즉 극중 인물의 가무 연기)가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보면 송금잡극은 다양한 예술 성분과 형식을 융합한 예술양식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며, 그것은 완전한 희극양식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남희(南戱)와 북잡극(北雜劇)의 탄생에 직접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여건을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남희(南戱) - 희극의 결실 모든 조건이 전부 갖추어진 후 중국희극은 성숙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동남쪽에 위치한 온주(溫州)에서 처음으로 성숙되었다. 얼핏 보면 중국희극의 첫 성숙지가 변경(汴京)의 구란(勾欄)이나 임안(臨安)의 와사(瓦肆)가 아니라는 사실이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사실 남희가 온주 일대에서 조용히 성장하면서 북방의 잡극보다 먼저 성숙하게 된 데는 객관적인 원인이 있었다. 송대의 온주는 남방의 중요한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로 시민계층이 두텁게 성장하여 생활환경이 조용하고 문화도 비교적 발달한 편이었다. 북방의 대도시에 비해 온주는 중앙조직이 집중되지 않아 그다지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중앙조직의 견제와 제약도 많이 받지 않았다. 이에 이 남방의 상업도시는 북방의 대도시에 비해 더욱 많은 자유와 여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이렇게 하여 대내외적인 여건이 전부 갖추어짐으로써 남희는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남희는 희문(戱文)이라고도 하며, 형성 지역이 영가(永嘉: 온주)였기 때문에 "영가잡극(永嘉雜劇)" 또는 "영가희곡(永嘉戱曲)"이라고도 한다. 그것을 남희라 한 것은 북방의 잡극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한 말이다. 최초의 남희로는 ≪조정녀(趙貞女)≫와 ≪왕괴(王魁)≫가 있지만 그것들은 극목만 남아있고 그 극본은 이미 망실되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것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서생이 권문세족과 혼인하여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송대에서 원대에 이르는 200여년간 남희의 극목은 분명 적지 않았을 테지만 그것이 민간에서 제작 공연되었던 관계로 그 판본이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볼 수 있는 자료는 각종 기록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곡문(曲文) 뿐이다.
3. 고극(古劇) ≪장협장원(張協狀元)≫ 1920년에 중국의 한 학자가 런던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산실되었던 ≪영락대전(永樂大典)≫ 1권(제 13991권)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3종의 희문이 있었는데 ≪장협장원≫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장협장원≫의 발견으로 우리는 마침내 한 편의 완전한 남희 극본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장협장원≫은 남희의 원래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학계의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극의 시작은 한 배우가 외부인의 신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다 남자 주인공이 강도를 만나는 대목에서 강창은 희문으로 바뀌고 배역을 맡은 배우가 극중 인물을 연기하는 희극적 공연으로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고극 ≪장협장원≫에는 설창에서 희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것의 문화적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4. 중국 희곡예술 특징의 확인 남희는 예술적인 면에서 다소 조잡하지만 그것은 이미 중국희곡의 기본적인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먼저 그것은 노래와 대사, 동작 등의 표현 수단을 종합하여 한 편의 완전한 이야기를 연출하였으며, 이야기의 서술이 극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시작과 결말을 갖추고 있으면서 원인과 결과도 분명하다. 내용 전개의 필요에 따라 구성이 신축성 있고 자유로와 긴 것은 50~60착(齣)이나 되지만 짧은 것은 20~30착에 불과하다. 이것은 희극이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반영하는 데 편의를 제공해준다. 희곡의 곡조는 주로 민간음악에서 취하여 민가, 사곡, 제궁조 등의 음악성분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궁조와 음률도 하나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민간의 사곡이나 시골의 새로운 소곡이라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만 하면 그것을 얼마든지 함께 사용했다. 공연을 할 때는 모든 배역들이 전부 노래를 할 수 있었으며, 가창 형식도 독창, 대창(對唱: 대화의 응답식으로 노래부르는 창법), 제창 등이 있어 풍부하고 다양하였다. 대사는 운문식의 낭송도 있고 구어체의 대사도 있는데, 그것은 노래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엇섞여 들어가 노래와 대사가 결합되는 음악구조를 형성하였다. 배우의 몸 동작은 "과(科)", "개(介)"라 한다. 과와 개는 바로 일상생활을 모방한 상징적인 연기이다. 예를 들면 남희 ≪비파기(琵琶記)≫에서 조오랑(趙五娘)은 의창(義倉: 흉년에 대비하여 미곡을 저장해 둔 창고)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이에 채공(蔡公)은 집에서 주시하고 있다가 그녀를 보았을 때, "채공은 다리가 걸려 넘어지는 동작을 하고 조오랑은 그를 부축한다. 그러자 채공은 조오랑을 때리는 시늉을 한다." 이러한 무대 연기는 바로 채공이 나이가 들어 실수로 다리가 걸려 넘어지자 조오랑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지만 오히려 시아버지의 질책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채공이 조오랑을 때리는 시늉을 하는 것이 바로 상징적인 연기이다. 남희의 몸 동작은 민간의 춤동작을 흡수하여 희극적인 무대동작을 무용화시켰다. 남희에서는 7종의 각색이 50여명에 이르는 극중 인물을 모두 연기하는데, 그중 남녀 주인공역인 생(生)과 단(旦)은 "참군"과 "창골"의 정(淨, 또는 부정 副淨), 말(末, 또는 부말 副末)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둘은 민간 가무희 중의 축(丑)과 함께 하나의 골계 각색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남희의 주요 각색 5종이다. 그것들은 생(生), 단(旦), 정(淨), 말(末), 축(丑)으로 구성된 중국 희곡예술의 각색의 진용과 항당의 구조를 마련하는 기초가 되었다. "외(外)"는 생(生) 이외의 또 하나의 남자 배역, 즉 남자 조연이고, "첩(貼)"은 단(旦) 이외의 또 하나의 여자 배역, 즉 여자 조연이다. 극은 전반적으로 생과 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그것으로써 줄거리의 핵심을 구성하지만 내용은 비교적 엄숙하고 그들의 연기도 정극(正劇)의 색채를 구비하고 있다. 이것은 익살과 해학을 위주로 하던 전대의 공연 양식에 비해 아주 두드러진 예술적 발전이다. 정, 말, 축의 익살스런 연기나 대사도 당연히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주고 분위기를 조절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남희는 희극에서 연기의 상징성이라는 원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활용하였다. 대형 희극은 표현에 있어서 많은 장소와 비교적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당연히 빈약한 무대 조건과 마찰이 일어나고, 무대 자체의 표현 능력과도 마찰이 일어난다. 남희의 배우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자신의 연기를 통해 신축성 있고 유동적인 무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해내었다. 예를 들면 ≪장협장원≫에서 장협(張協) 일행은 경성을 떠나 임지에 가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데, 이때 배우들은 4개의 곡만 돌아가며 노래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마을을 하나 하나 지나" 오계산(五鷄山)에 도착하게 된다. 결국 희곡이 성숙단계에 접어든 이후로 배우나 관중을 막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사실적인 모방을 추구하지 않고 희극을 희극 그 자체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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