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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은
재위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경제(景帝) 유계(劉啓)의 정책을 계승,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여 왕후장상의 봉토를 자식들에게 분봉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많은 왕후(王侯)들의 작위를 박탈하여 제후국들의 중앙정권에
대한 위협적인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儒家)를
제외한 기타 학설의 전파를 금지하고, 유학을 봉건사회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유학은 다시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공근(孔僅), 동곽함양(東郭咸陽)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철과
제염을 국영으로 회수하여 국가의 경제적 역량을 견실하게
다졌다. 그리고 상홍양(桑弘陽)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성에
평준관(平準官)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물류 수송과 무역을 정부에서 직접 관장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황하(黃河)를 정비하여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주변 마을로 이주시켰다.
군사적으로는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고 흉노의 위협을
사전에 없앴다. 그리하여 광대한 황하 유역의 경제 문화적
발전을 확보하였다. 또 남방에서 할거하던 남월(南越: 고대
남방 월인<越人>의 한 갈래) 정권을 제거하고 지금의
광동 광서 지구를 통일하였으며, 아울러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등에 군(郡)을 설치하여 한족과 각 소수민족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두 차례나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신강성 서부), 오손(烏孫:
지금의 신강성 이려하<伊犁河>
일대), 안식(安息: 지금의 이란고원) 등지로 가서 서역
민족과 한족의 경제 문화 교류를 강화하고, 장안에서 유럽
로마제국에 이르는 '비단길(絲綢之路)'을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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