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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

 

【 강희황제(康熙皇帝) 】                            [강희황제의 황후들]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는 청(淸)나라 제4대 황제로 이름이 현엽(玄燁: 1654~1722)이고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셋째 아들이다. 순치황제가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하였다. 61년간 재위하여 중국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향년 69세로 병사하였으나 일설에는 대신 융과다(隆科多)에게 피살되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장지는 경릉(景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서북쪽 70리 창서산<昌瑞山>)이다.

현엽은 1661년 정월 순치황제가 병사한 그 날(辛亥日)에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강희(康熙)"로 고쳤다. 현엽은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에는 오배(鰲拜) 등 4명의 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6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권력을 전횡하고 있던 오배 등을 처형하고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대만(臺灣)을 다스리던 정성공(鄭成功)의 손자 정극상(鄭克)을 항복시켜 중국을 새롭게 통일하였다.

또 야크사(雅克薩)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축출한 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여 동부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회강(回疆: 회교도들이 거주하는 변경지역으로 신강성 천산남로<天山南路>)과 즁갈(準爾) 등지의 귀족 반란을 평정하고 농경을 장려하였으며, 한족 지식인들과 연계하여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강희자전(康熙字田)≫ 등을 편찬하고, 자연과학을 크게 제창하여 ≪황조전람도(皇朝全覽圖)≫ 등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다민족 국가인 청나라의 국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짐으로써 청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통일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긴 하였지만 여러 차례의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고, 농민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등 백성들을 아주 심하게 탄압했다.

성조는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충신과 간신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았다. 그의 재위 말기에 강남총독(江南總督) 갈례(禮)가 탐욕스럽고 교만하여 무고한 사람을 헤치길 좋아하였다. 당시 소주지부(蘇州知府) 진붕년(陳鵬年)은 청렴한 관리로 그 성품이 강직하고 아첨을 싫어하여 갈례와 잦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갈례는 그를 시기하여 탄핵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흑룡강(黑龍江)으로 유배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성조는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붕년의 뛰어난 재학(才學)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북경으로 불러 도서 편찬을 맡기려 하였다. 갈례는 다시 성조에게 상소를 올려 진붕년이 지은 <유호구(游虎丘)>라는 시에 성조에 대한 원한과 불만의 정서가 가득하니 그를 엄중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 시의 원문을 동봉하여 바쳤다. 성조는 진붕년의 시를 자세히 읽어본 후 자기에 대해 어떠한 원한이나 불만의 내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다시 갈례의 상소를 자세히 읽어본 후에 그것이 진붕년을 모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성조는 즉시 신하들을 어전에 불러모아 놓고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갈례는 말썽을 일으키길 좋아하여 소주지부 진붕년이 약간 명성이 있다고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의 <유호구> 시에 원한과 불만의 마음이 있다고 상소를 올렸소. 짐이 그 시를 자세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으니 이는 완전히 무고인 것이오. 비천한 소인배들은 그 수단이 대체로 이러한데 짐이 어찌 이러한 소인배의 속임수를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이렇게 말을 한 다음 성조는 갈례의 상소와 진붕년의 시를 신하들에게 공개하여 읽어보게 하였다. 갈례는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꼴이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성조는 갈례의 정수리에 일침을 가하여 심성이 바르지 못하고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신하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1722년 봄 성조의 나이 70여세 때 그는 경로사업의 일환으로 65세 이상의 만주족과 한족 관리 및 퇴직 관리들을 모두 건청궁(乾淸宮)으로 불러들여 늦게까지 주연을 베풀었다. 이 주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약 1000여명에 달했기 때문에 그것을 "천수회(千會)"라 한다.

 

성조에게는 모두 35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파당을 결성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에 성조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위한지 14년 후에 즉시 4세의 적장자 윤잉(允)을 황태자로 삼았다가 3년 후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였다.

2개월 후에 다시 윤잉을 황태자로 삼았으나, 24년 후에 그는 태자의 권력이 비대해져 자신의 황권을 직접 위협하자 다시 윤잉을 폐위시키고 구금하였다.

결국 황태자 책봉을 너무 일찍 공개하여 많은 폐단을 경험한 성조는 임종 전에 유서를 남겨 거기에 후계자 문제를 명시해 두었다. 그가 만년에 가장 마음에 둔 아들은 14번째 아들 윤제(允)였다. 그는 특별히 윤제를 무변대장군(撫邊大將軍)에 임명하여 그에게 서북지역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키는 중임을 맡겼다.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부여하여 그의 권위를 높여 줌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여건을 마련해주었던 것이었다.

강희제의 경릉(景陵)

1722년 11월 8일 성조는 감기에 걸려 심한 열과 기침으로 호흡곤란에 시달리다 어의의 치료로 병세가 호전되어 창춘원(暢春園)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그는 친히 윤제를 후계자에 임명한다는 유서를 썼다고 한다. 당시 성조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신하는 북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보군통령(步軍統領) 융과다(隆科多)였다. 융과다는 성조의 넷째 아들 윤정(胤禎: 청 5대 세종<世宗> 옹정황제<雍正皇帝>)의 외삼촌이자 그의 측근으로 줄곧 윤정을 황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조는 윤정을 전혀 의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 이에 융과다는 적절한 때를 틈다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十四子)"고 되어 있는 유서의 내용을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于四子)"로 바꿔 버렸다. 11월 13일 성조가 돌연히 사망하였는데 융과다에 의해 시해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어떤 학자들은 성조의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 친히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서를 공개하였으며, 서북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윤제와 구금되어 있던 윤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황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유서가 수정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서는 만주어로 씌여졌으므로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十四子)"를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于四子)"로 고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성조가 갑자기 사망하였으므로 유서를 남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하나 제기되고 있다. 즉 윤정은 평소 성조의 총애를 받았는데, 8세 때는 성조를 따라 북방지역으로 순행을 갔고, 10세 때는 사냥을 나갔다가 패자(貝子: 청대 작위의 하나)에 책봉되기도 하였으며, 32세 때는 친왕(親王: 청대 최상급의 작위)에 책봉되었고, 일찍이 황명을 받들어 조정의 군정(軍政)과 재정의 대권을 관장하였다. 여러 황자들이 노골적으로 황태자 쟁탈전을 벌일 때 윤정은 비록 암암리에 세력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거기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성조의 환심을 사는데 치중했다. 이에 성조는 윤제와 윤정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윤정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성조는 그가 죽은 후의 묘호(廟號)이며, 역사에서는 그를 강희황제(康熙皇帝)라 칭한다.

        

 [강희황제의 황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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