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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야크사(雅克薩)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축출한
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여 동부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회강(回疆: 회교도들이 거주하는
변경지역으로 신강성 천산남로<天山南路>)과 즁갈(準噶爾)
등지의 귀족 반란을 평정하고 농경을 장려하였으며,
한족 지식인들과 연계하여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강희자전(康熙字田)≫ 등을 편찬하고, 자연과학을
크게 제창하여 ≪황조전람도(皇朝全覽圖)≫ 등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다민족 국가인 청나라의 국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짐으로써 청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통일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긴 하였지만
여러 차례의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고, 농민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등 백성들을 아주 심하게 탄압했다.
성조는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충신과 간신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았다. 그의 재위 말기에 강남총독(江南總督) 갈례(噶禮)가
탐욕스럽고 교만하여 무고한 사람을 헤치길 좋아하였다.
당시 소주지부(蘇州知府) 진붕년(陳鵬年)은 청렴한
관리로 그 성품이 강직하고 아첨을 싫어하여 갈례와
잦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갈례는 그를 시기하여
탄핵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흑룡강(黑龍江)으로
유배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성조는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붕년의 뛰어난 재학(才學)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북경으로 불러 도서 편찬을 맡기려
하였다. 갈례는 다시 성조에게 상소를 올려 진붕년이
지은 <유호구(游虎丘)>라는 시에 성조에 대한
원한과 불만의 정서가 가득하니 그를 엄중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 시의 원문을 동봉하여 바쳤다.
성조는 진붕년의 시를 자세히 읽어본 후 자기에 대해
어떠한 원한이나 불만의 내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다시 갈례의 상소를 자세히 읽어본 후에 그것이
진붕년을 모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성조는
즉시 신하들을 어전에 불러모아 놓고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갈례는
말썽을 일으키길 좋아하여 소주지부 진붕년이 약간
명성이 있다고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의 <유호구>
시에 원한과 불만의 마음이 있다고 상소를 올렸소.
짐이 그 시를 자세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으니 이는 완전히 무고인 것이오. 비천한 소인배들은
그 수단이 대체로 이러한데 짐이 어찌 이러한 소인배의
속임수를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이렇게
말을 한 다음 성조는 갈례의 상소와 진붕년의 시를
신하들에게 공개하여 읽어보게 하였다. 갈례는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꼴이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성조는
갈례의 정수리에 일침을 가하여 심성이 바르지 못하고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신하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1722년
봄 성조의 나이 70여세 때 그는 경로사업의 일환으로
65세 이상의 만주족과 한족 관리 및 퇴직 관리들을
모두 건청궁(乾淸宮)으로 불러들여 늦게까지 주연을
베풀었다. 이 주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약 1000여명에
달했기 때문에 그것을 "천수회(千叟會)"라
한다.
성조에게는
모두 35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파당을 결성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에 성조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위한지 14년 후에 즉시 4세의
적장자 윤잉(允礽)을
황태자로 삼았다가 3년 후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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