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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

 

청(淸)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이름이 홍력(弘曆: 1711~1799)이고 옹정황제(雍正皇帝)의 넷째 아들이다. 옹정황제가 죽은 후에 황위를 계승하여, 60년간 재위하다 89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하북 유릉(裕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서북쪽 창서산<昌瑞山>)이다.

 

홍력(弘曆)은 옹정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보친왕(寶親王)에 책봉되었다. 1735년 8월 옹정황제가 암살당한 뒤에 신하들은 내관에게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쓰인 액자 뒷면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오게 하여 밀서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넷째 황자 홍력을 황태자에 봉하노니 짐을 뒤이어 황위를 계승하라. "고 씌여 있었다. 이에 홍력은 그 달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건륭(乾隆)'으로 고쳤다.

원래 홍력의 모후는 옹친왕(雍親王: 즉 옹정)의 비였을 때 딸아이를 한 명 낳았는데, 같은 날 해녕(海寧)에 사는 진각로(陳閣老)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옹친왕의 비는 딸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옹친왕의 환심을 살 수 없을까 염려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말하였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진각로의 사내아이를 안고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가 낳은 딸아이와 바꿔치기를 했다. 진각로의 집안에서는 항변할 수도 없었고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력이 강남으로 여섯 차례 내려갔을 때 해녕으로 가서 그의 친부모를 몰래 만났다고 한다.

홍력은 재위 기간에 즁갈부락을 평정하고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대소화탁목(大小和卓木)의 세력을 제거하여 변경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영국 특사 마카르니(George Macartney)가 건의한 침략적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장수들이 잘난척하며 의시대면 그는 그들의 무공을 완벽하다 칭찬하고 자신은 완전히 늙었다고 낮추었다.

천산남로를 평정할 때 청나라 군은 소화탁목(小和卓木)의 비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으로 몸에는 항상 특이한 천연향이 풍겨나와 사람들은 그녀를 향비(香妃)라 불렀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현혹된 홍력은 그녀를 자기의 비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가라 명한 다음 특별히 회교도를 불러 그녀를 시중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궁궐 안 서원(西苑)에 회족(回族)의 집과 교회를 지어놓게 하였다. 그러나 향비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절개를 지켰다. 하루는 홍력의 명을 받은 궁녀가 다시 찾아가서 향비를 설득하였지만 그녀가 칼날이 시퍼른 비수를 사납게 꺼내는 터에 깜짝 놀란 궁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홍력이 예기치 못하게 불행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한 태후는 홍력이 교외로 제사 지내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향비를 불러 그녀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향비가 "죽음으로 절개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후는 그것을 허락하였고 그녀는 바로 자살하였다. 홍력은 궁궐로 돌아온 후 그 사실을 알고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 그후 향비의 시신을 신강(新疆) 카슈(喀什)로 돌려보내 장사지내주고 향비의 무덩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최근 전문가들은 많은 고증을 거쳐 향비가 홍력의 용비(容妃)였으며, 신강 위구르족 출신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곽집점(集占)의 반란 평정 전쟁에 참가하는 등 민족단결 촉진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홍력과 태후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에서 빈(嬪)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더 나아가서 용비가 되었고, 위구르족 전통 복장을 하고 회족 음식을 먹으며 홍력을 따라 각지를 주유하는 등, 궁궐에서 28년간 생활하다가 58세에 병으로 죽어 동릉(東陵)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녀의 관 위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경전이 씌여져 있고, 그녀의 이야기는 중화민족단결사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홍력은 여섯 차례나 강남으로 내려가 유명한 도시들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홍력이 일으킨 문자옥은 청대 전체를 통털어 횟수가 가장 많았다. 한번은 문인 호중조(胡中藻)가 "한 줌의 심장으로 청탁을 논한다.(一把心腸論濁淸)"라는 시구를 썼는데, 홍력은 그것이 청나라 조정을 비방한 것이라 여기고 호중조와 그 일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또 한번은 홍력이 심심해서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 등을 편찬한 오고전서관(五庫全書館)에 들어갔다. 그때 오고전서관의 책임자였던 기윤(紀)은 몸집이 뚱뚱하여 더위를 많이 타는데다 날씨마저 찌는 듯 하여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변발을 머리 위에 올린채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홍력이 들어오는 것을 본 기윤은 옷을 입을 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홍력은 일부러 못본척 하고 기윤이 숨어있는 탁자 옆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앉았다. 한참 지난 후 기윤은 땀에 축축히 젖었다. 그는 오고전서관 안에 소리없이 정적만 흐르자 "라오터우즈(老頭子: 영감)가 나가셨나?"라고 물으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옆에 앉아 있는 홍력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옷을 걸쳐입고는 엎드려서 죄를 청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라오터우즈(老頭子)'라 불렀소? 이치에 맞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지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라는 홍력의 물음에 기윤은 "'라오터우즈(老頭子)'란 말은 경성에 사는 신하와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황제를 칭하는 말이지 결코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황제는 만세라 칭하니 어찌 '라오(老)'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만백성의 위에 계시니 어찌 '터우(頭)'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하늘의 아드님(天子)이시니 어찌 '즈(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홍력은 화를 가라앉히고 웃으면서 "그대는 정말 달변이군. 내 그대의 죄를 사면하리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홍력은 기윤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으며, 그 덕에 기윤은 계속하여 승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홍력은 재위 후기에 화신(和)을 20년간 임용하였다. 중국역사상 최대의 탐관오리인 화신이 고위 관직에 있었던 20년간 탐관오리가 극성하여 정치는 부패해지고 각처에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홍력은 일찍이 아홉 차례나 곡부(曲阜)로 순행을 나갔는데, 두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풍경이 아름다운 고반지(古泮池: 곡부성 남쪽에 위치한 반원형의 연못) 북쪽에 새로 지은 행궁(行宮: 즉 반궁<泮宮>)에 머물렀다. 그는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천년의 고백성 푸르름을 더하고, 비온뒤 봄꽃이 물위에 붉게 비치네.(千年古栢城頭綠, 過雨春花水面紅)"라고 읆조렸다. 그는 눈앞의 곡부성이 명나라 때 동쪽 교외의 옛성을 옮겨온 것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찌 노(魯)나라 유적에 속하는 고반지이겠는가? 고반지는 당연히 옛성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붓을 들어 "십리 동쪽 교외의 옛 노나라성이 있는데, 새로 지은 성에 어찌 반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오(十里東郊舊魯城, 新城安得泮池名)"라는 시구를 써내려갔다. 이 시는 비석에 새겨져 고반지 옆에 세워져 있다. 홍력은 네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사료를 폭넓게 조사한 결과, 곡부의 옛성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송나라 때 동쪽 교외로 옮겼다가 명나라 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가져 온 것이기 때문에 고반지가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번 시에서 자신이 내린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한 나머지 다시 <주필고반지(駐古泮池: 고반지에 머물며)>라는 시를 한 수 썼다.

 此地非常地         여기는 평범한 곳 아니고,

 新城卽故城         새 성이 옛 성인 곳이라네,

 館仍今日駐         오늘도 숙소에 머무노니,

 池是故時淸         연못이 옛날처럼 맑구나.

 

시를 다 쓴 후에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긴 홍력은 앞에서 시를 잘못 지은 것은 자신이 책을 자세히 읽지 않아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기 때문이며,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경솔하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그는 자신이 잘못 쓴 시에 대해 <고반지증의(古泮池證疑)>라는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후 고반지 옆에 세워두게 하였으니, 그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1795년말 홍력은 황위를 황태자에게 선양하기로 결심하고 조서를 내렸다.

"짐은 25세에 황위를 계승하여 당시에 하늘에 맹세하기를, 만약 60년간 재위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감히 할바마마(강희제를 가리킴)와 같은 해 만큼 황위에 있지는 않겠다고 하였노라. 지금 짐이 재위한지가 만 60년이 되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으니 15번째 황자 옹염(琰)에게 황위를 선양하기로 결정하였도다. 그가 정사를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당분간 내가 대신 처리할 것이니라."

 

화신 등의 대신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였지만 홍력은 그것을 듣지 않고 1796년 정월 초하루 태극전(太極殿)에서 선위의식을 거행한 후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실권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1799년 정월 홍력은 병이 나서 많은 명의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초사흘날 양심전(養心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홍력이 죽은 후 그의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하였으며, 역사에서는 그를 건륭황제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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