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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부터
그는 요동(遼東)의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에 심양(沈陽)으로 천도하였다.
누르하치는
만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 중에 국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후계자를 확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8명의 화석패륵(和碩貝勒: 패륵은 청나라의 종실
및 몽고 외번<外藩>에 수여된 작위. 지위는 군왕<郡王>의
아래 패자<貝子>의 위)에게 공동으로 조정대사를
처리토록 지시하였다.
1626년
초에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영원(寧遠: 지금의 요녕성
흥성현<興城縣>)을 공격하였다. 명나라 조정의 영원성(寧遠城)
수비 대장 원숭환(袁崇煥)은 완강히 버티면서 성을 타고
기어 올라가던 만주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으며, 이로써
만주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누르하치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성 아래에 구멍을 뚫어 성벽을
허물고 입성할 준비를 시켰다. 이를 발견한 원숭환은 서양에서
도입한 화포로써 반격을 가하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여 황급히 전군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같은 해 7월 누르하치는 상처가 재발하여 청하탕천(淸河湯泉)에서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8월에는 상처가 더 심해져 배를
타고 심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일찍이 대패륵(大貝勒)과 간통한 적이 있던 왕비 나라씨(納喇氏)를
목매어 자결토록 명하였다. 8월 경술일(庚戌日)에 누르하치는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애계보(애鷄堡, 애=雲+愛: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 남쪽)에서 죽었다.
청나라가
건국된 후에 누르하치는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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