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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가
강화를 맺자고 전하를 오게 한 것은 속임수를 쓰기 위한
흉계입니다. 그들은 이미 변경성 아래까지 다다랐는데 화친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번에 가시는 것은 스스로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백성들도
그의 말을 가로막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조구는 자신이
금나라에 억류될까 두려워 상주(相州: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머물면서 하북병마대원수(河北兵馬大元帥)라 칭했다.
1127년
금나라 군대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을 함락시킴으로써
북송이 멸망하자, 그는 남경(南京: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쪽)으로 도피하여 황제에 즉위한 후 연호를 '건염(建炎)'이라
하였다.
조구는
황제에 즉위한 후 금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하여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임안(臨安: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에
도읍을 정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번은 조구가 황하
북쪽에서 금나라 군대에 추격당하여 혼자 남게 되었는데,
충신의 아들 이마(李馬)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구출하여
강가로 도망가서 간신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조구는 자신이 천명을
받고 즉위한 천자로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니마도강왕(泥馬渡康王)' 고사를 만들어내었다. 그는
이마가 사실을 폭로할 것이 두려워 그에게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를 죽여버렸다.
조구는
재위 기간에 이강(李綱)을 재상에 임명하여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을 조직토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얼마후 그는 이강을 파면하고 투항파
황잠선(黃潛善), 왕백언(汪伯彦)을 기용함으로써 금나라에
대한 항전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그는 임안으로 도피한
후에 다시 전황이 절박해지자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 주전파 장수를 등용하여 항전의 기치를 들었지만, 나중에
다시 투항파 진회(秦檜)를 재상에 임명하여 금나라에 화친을
청하는 굴욕적인 타협을 하였다. 1142년 그와 진회는 황하를
건너 승세를 타고 금나라 군대를 추격하던 악비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악비와 한세충 등의 병권을 회수하였다. 얼마후
다시 악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그를 죽이고, 신하의
예를 갖추어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금나라와 '소흥화의(紹興和議)'를
체결하였다. 조구는 대내적으로 동정호(洞庭湖)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킨 종상(鐘相), 양태(楊太)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161년
금나라 황제 완안량(完顔亮)이 화친을 파기하고 다시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하였다. 조구의 굴욕적인 안정 희구 정책이
군민(軍民)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의 지속적인 통치
유지가 어렵게 되자, 그는 재상 진강백(陳康伯) 등과 상의한
후, 너무 연로하여 국정을 계속 돌보기 힘들어 담담한 마음으로
심신을 수양하겠다고 하면서, 1162년 6월 을해일(乙亥日)
퇴위를 선포, 태자 조신(趙愼)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어 덕수궁(德壽宮)으로 물러났다.
조구는
퇴위한 후에 스스로 조정의 일에 대해 묻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정사에 계속 간여하였다. 하루는 그가 영은사(靈隱寺)
냉천정(冷泉亭)에 가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어떤 행자가
그를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행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내가
보기엔 네 모습이 행자같지 않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행자는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저는
본래 군수(郡守)였는데 감사(監司)의 미움을 사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평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의탁하여 천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조구는 즉시 "내가
내일 황제에게 말해주겠다."고
대답했다. 궁궐로 돌아온 후에 그는 정말로 황제에게 그
일을 말하고 그의 복직을 요청했다. 며칠 후 조구가
다시 냉천정에 갔는데 그 행자가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궁궐로 돌아온 후 연회에 참석하였으나 얼굴에 노기가
가득하였다. 황제 조신이 아버지 조구에게 왜 화가 났는지
묻자, 조구는 "내가
늙었다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내가 며칠 전에
어떤 행자의 일을 황제에게 말했는데 왜 그 일을 처리해주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신은 "제가
어제 이미 재상에게 말했는데, 재상이 그 일을 조사하고
나서 말하기를, 그 자는 뇌물을 챙기고 부정을 행한 자로
죽음을 면하게 한 것만도 이미 관대한 처사인데 그를 다시
복직시킨다는 것은 실로 불가하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조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다면
나더러 앞으로 그 사람을 어떻게 다시 만나란 말이냐? 난
이미 그를 용서해주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단 말이야."라고
하였다. 조신은 하는 수 없이 재상에게 가서,
"태상황께서 크게 진노하시니, 그 자가 설령 모반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를 복직시키도록 하시오."라고
명하였다. 재상은 조신이 시키는대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1187년
10월 을해일(乙亥日) 고종은 임안궁(臨安宮) 안의 덕수전(德壽殿)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구가
죽은 후 그의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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