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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의 창시자 문제(文帝) 양견(楊堅)

 

수(隋) 문제(文帝)는 이름이 양견(楊堅: 541 ~ 604)이다. 북주(北周)의 수왕(隋王)으로 후에 북주의 정제(靜帝)를 폐위시키고 황제라 칭하여 수(隋)나라를 세웠다. 24년간 재위하다가 64세 때 아들 양광(楊廣)에 의해 살해되었다. 장지는 태릉(泰陵: 지금의 섬서성 무공현<武功縣> 서남쪽)에 있다.

양견은 홍농화음(弘農華陰: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 출신으로, 북주의 대귀족 양충(楊忠)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수국공(隋國公)이 되었으며, 그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 천원제<天元帝>) 우문빈황후(宇文빈皇后, 빈=斌 아래에 貝)이다.

서기 580년에 북주의 선제가 죽자 그는 관서(關西) 지역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아 외척 신분으로 입궁하여 정무를 보좌하다가 승상에 임명되어 대권을 장악한 후에 수왕(隋王)에 책봉되었다.

581년 2월 갑자일(甲子日)에 그는 9세의 어린 북주 황제 정제(靜帝)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랐다. 국호를 '수(隋)'라 하고, 도읍을 대흥(大興)에 정한 후에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이라 고쳤으며, 연호를 '개황(開皇)'이라 하였다.

황제에 오른 양견은 587년에 후량(後梁)을, 589년에 진(陳)을 각각 멸망시킨 다음 전국을 통일하고, 서진(西晋) 말기부터 300여년간 지속된 분열 국면을 종결지었다.

양견은 북주(北周)를 멸망시키고 수(隋)나라를 세우기는 하였지만, 항상 자신이 너무 쉽게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민심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여 언제나 경비태세를 강화하고 수왕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선조들의 두 가지 소중한 경험을 받아들였다.

첫째는 근검절약이었다. 그는 태자 양용(楊勇)에게, "예로부터 제왕이 사치를 하면 오래갈 수 없으니, 너는 반드시 근검절약을 이행하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그 자신은 정무를 보좌할 때부터 근검절약을 제창하여, 당시 사대부들의 평상복은 비단 대신 면직물로 만들도록 하고, 장신구도 금이나 옥 대신 구리나 쇠, 골각(骨角)을 사용하게 했다.

황제가 된 후에 양견은 이질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이질약 처방 중에 호분(胡粉: 조가비를 태워서 만든 흰가루) 한냥이 필요하였지만 온 궁중을 다뒤져도 결국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그가 실로 짠 옷깃 하나가 필요하였는데 궁중에 그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몸소 실행에 옮긴 근검절약 정신은 바로 그의 정치개혁의 근간이 되었다.

둘째는 탐관오리의 배척이었다. 그는 관리들의 업무를 정비하고 관리에 대한 심의제도를 수립하였다. 청렴한 관리에게는 전답과 직물을 포상으로 내리고 승진을 시켜 그 선행을 천하에 널리 알렸으며, 탐관오리는 엄히 처벌하고 측근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관리들의 일거일동을 정탐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몰래 어떤 관리에게 사람을 보내어 뇌물을 주게 하고, 그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즉시 사형에 처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법을 집행할 때 엄격하고 공정했다. 한번은 아들 양준(楊浚)의 생활이 사치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크게 진노하여 양준을 구금하였다. 대신 양소(楊素)가 처벌이 너무 심하다고 건의하자, 그는 "황자와 백성의 법률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황자의 법률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문제의 이러한 조치는 권세를 부리는 관리들이 함부로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줄어들고 백성들은 각종 부담이 줄어들어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나갔다.

양견은 역대 제왕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백성들의 고통에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 594년 관중(關中) 지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는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조사해 오게 하여, 그들이 콩가루와 겨를 섞어 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음식을 신하들에게 내보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책망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자신이 평소에 먹던 음식을 물리치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굶주린 백성들을 데리고 비교적 풍요로운 낙양으로 가서 밥을 먹이고, 시위들에게 그 백성들을 쫓아내거나 위협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는 말 고삐를 당겨 길을 양보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힘든 길에서는 그는 또 시위들에게 명하여 짐을 진 이재민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했다.

서기 600년 제주(齊州)에 왕가(王伽)라는 하급 관리가 있었는데, 이삼(李參) 등 70여명의 죄인들을 경성으로 압송해 가던 중 형양(滎陽)에 이르러 왕가는 이삼 등에게, "너희들은 국법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너희들을 호송하는 인부들을 보라.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 텐데 너희들은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삼 등은 왕가에게 사죄를 하였다. 그러자 왕가는 인부들을 해산시키고 이삼 등의 죄인들을 석방한 다음 약속한 날짜에 경성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만약 너희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가 너희들 대신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 모두 경성에 모였는데 70여명에서 빠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제는 크게 칭찬하고, 이삼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처자와 함께 입궁토록 하고, 그들의 사면을 선포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관리가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성으로 백성들을 대하면 백성들을 교화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하고, 모든 관리들이 왕가를 본받도록 하였다.

양견은 잘못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즉시 인정하고 시정하였다. 한번은 신하 신단(辛亶)이 빨간색 바지를 입으면 관운이 형통할 것이라 떠들고 다녔다. 요상한 법술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판단한 양견은 매우 화를 내면서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이에 사법 대신 조작(趙綽)이 조리있게 반박하면서, "법률에 의하면 신단의 죄는 사형에 처할 만한 것이 안되니 신은 감히 폐하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양견은 크게 노하여, "짐이 보기에 그대는 다른 사람을 감싸는데만 정신이 팔려 자신을 감쌀 줄 모르는구나!"라고 하고는, 조작과 신단을 함께 참수하라 명하였다. 사형을 집행할 즈음에 양견이 조작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지 묻자, 조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법을 집행해 왔기에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신을 죽이실 지언정 절대로 신단을 억울하게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 말을 듣고 양견은 화가나서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조작은 분명 죽음으로써 법을 지킨 것이니 그의 정직함을 칭찬해야 마땅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즉시 조작을 석방하고 신단의 사형을 취소하였으며, 그 다음날에는 조작을 불러 그의 행동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양견은 재위 시기에 '균전제(均田制)'의 지속적인 추진, 호적에서 누락된 농가 조사를 통한 납세자 증대 및 국가 재정 수입 확보, 권문세가의 세력 약화 등을 통하여 수나라 초기의 사회 경제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그는 관료체제를 개혁하여 중앙에는 '삼성육조제(三省六曹制)'를 확립하고, 지방에는 행정기구를 축소하였다. 그는 조조의 위(魏)나라 이래로 시행되어 온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여 시험을 통해 관리를 채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수왕조를 더욱 견고하고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역대 제왕들 중에서 수 문제 양견은 비교적 훌륭한 정치가라는 평을 듣는다.

서기 604년 7월, 양견은 병이 위중하여 장안의 인수궁(仁壽宮) 대보전(大寶殿)에 누워 있었다. 갑신일(甲辰日)에 그는 스스로 안되겠다는 것을 알고 신하들을 불러놓고 흐느껴 울면서 그들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정미일(丁未日)에 둘째 아들 양광(楊廣: 수 양제)이 대신 양소(楊素), 장형(張衡), 우문술(宇文述)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 궁녀들을 쫓아내고 대보전으로 진입하여 양견(당시 64세)을 죽였다.

양견이 죽은 후에 그의 묘호를 고조(高祖), 시호를 문제(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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