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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00년 제주(齊州)에 왕가(王伽)라는 하급 관리가 있었는데,
이삼(李參) 등 70여명의 죄인들을 경성으로 압송해 가던
중 형양(滎陽)에 이르러 왕가는 이삼 등에게, "너희들은
국법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너희들을 호송하는
인부들을 보라.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
텐데 너희들은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삼 등은 왕가에게 사죄를 하였다. 그러자
왕가는 인부들을 해산시키고 이삼
등의 죄인들을 석방한 다음 약속한 날짜에 경성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만약 너희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가 너희들
대신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 모두 경성에 모였는데 70여명에서 빠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제는
크게 칭찬하고, 이삼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처자와 함께
입궁토록 하고, 그들의 사면을 선포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관리가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성으로 백성들을 대하면
백성들을 교화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하고, 모든
관리들이 왕가를 본받도록 하였다.
양견은
잘못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즉시 인정하고 시정하였다.
한번은 신하 신단(辛亶)이 빨간색 바지를 입으면 관운이
형통할 것이라 떠들고 다녔다. 요상한 법술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판단한 양견은 매우 화를 내면서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이에 사법 대신 조작(趙綽)이 조리있게 반박하면서,
"법률에 의하면 신단의 죄는 사형에 처할 만한 것이
안되니 신은 감히 폐하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양견은 크게 노하여, "짐이
보기에 그대는 다른 사람을 감싸는데만 정신이 팔려 자신을
감쌀 줄 모르는구나!"라고
하고는, 조작과 신단을 함께 참수하라 명하였다. 사형을
집행할 즈음에 양견이 조작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지
묻자, 조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법을 집행해 왔기에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신을 죽이실 지언정 절대로 신단을
억울하게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
말을 듣고 양견은 화가나서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조작은
분명 죽음으로써 법을 지킨 것이니 그의 정직함을 칭찬해야
마땅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즉시 조작을 석방하고
신단의 사형을 취소하였으며, 그 다음날에는 조작을 불러
그의 행동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양견은
재위 시기에 '균전제(均田制)'의 지속적인 추진, 호적에서
누락된 농가 조사를 통한 납세자 증대 및 국가 재정 수입
확보, 권문세가의 세력 약화 등을 통하여 수나라 초기의
사회 경제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그는 관료체제를 개혁하여
중앙에는 '삼성육조제(三省六曹制)'를 확립하고, 지방에는
행정기구를 축소하였다. 그는 조조의 위(魏)나라 이래로
시행되어 온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여 시험을 통해 관리를 채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수왕조를 더욱 견고하고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역대 제왕들 중에서 수 문제 양견은 비교적
훌륭한 정치가라는 평을 듣는다.
서기
604년 7월, 양견은 병이 위중하여 장안의 인수궁(仁壽宮)
대보전(大寶殿)에 누워 있었다. 갑신일(甲辰日)에 그는
스스로 안되겠다는 것을 알고 신하들을 불러놓고 흐느껴
울면서 그들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정미일(丁未日)에
둘째 아들 양광(楊廣:
수 양제)이 대신 양소(楊素), 장형(張衡),
우문술(宇文述)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 궁녀들을 쫓아내고 대보전으로 진입하여 양견(당시
64세)을 죽였다.
양견이
죽은 후에 그의 묘호를 고조(高祖), 시호를 문제(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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