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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번영과 쇠퇴를 이끈 현종(玄宗) 이융기

 

당 현종(玄宗)은 이름이 이융기(李隆基: 685~762),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 예종에게 황위를 선양받았다. 44년간 재위하다가 선위한 후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태릉(泰陵: 지금의 섬서성 포성현<蒲城縣> 동북 30리의 금속산<金粟山>)에 안장되었다.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임치왕(臨淄王)에 책봉되었다. 일찍이 노주별가(潞州別駕)를 역임하였으나 위황후(韋皇后)의 모함을 받고 파직되어(710년) 경성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위황후의 전횡을 두 눈으로 보면서 그녀가 조만간에 쫓겨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파직되어 한적한 생활을 보내면서도 비밀리에 용사들을 소집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만기(萬騎)'라 불리는 우림군(羽林軍) 진영의 많은 맹장들과 교분을 맺었다. 얼마 후 위황후가 중종(中宗)을 독살하고 그것을 비밀에 부친 다음, 위씨 집안 사람들과 그녀의 측근들에게 5만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을 방위하라 명하고 직접 황제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이융기는 그녀가 황제에 등극하기 전에 우림군을 동원하여 궁중으로 진격, 위황후와 안락공주(安樂公主)를 죽이고, 위씨와 무씨(武氏)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런 다음 태평공주(太平公主)에 의해 전면에 나서서 예종의 복위를 주도하고, 평왕(平王)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서기 712년 8월 경자일(庚子日) 예종의 선위를 받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였다.

현종 이융기가 황위를 승계한 후에 태평공주는 심복을 시켜 그를 독살하려 하였지만 모두 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서기 713년 태평공주는 다시 그를 죽이기 위해 정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현종은 태평공주와 그 일당들을 죽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융기는 재위 전기에는 현명한 군주였으나 후기에는 우매한 군주였다. 그가 처음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는 온 정열을 다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면서 오로지 태종(太宗)의 업적을 만회하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인재 등용에도 능했고 신하들의 간언도 잘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의 관리들 중에서 유능한 자를 골라 외지의 도독(都督), 자사(刺史)로 파견하고, 또 각지의 도독, 자사들 중에서 걸출한 자를 골라 중앙의 요직을 맡겼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을 선발하여 전근시키는 것을 제도화 하였으며, 그 직책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관리는 단호히 교체하였다. 서기 716년 그는 이부(吏部)에서 선발한 각지의 현령을 대전에서 직접 다시 테스트하고 그 중 직무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된 사람 40여명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냈다. 재위 전기에 그는 요숭(姚嵩), 송경(宋璟), 장가정(張嘉貞), 장설(張說), 이원굉(李元紘), 두섬(杜暹), 한휴(韓休), 장구령(張九齡) 등을 재상에 임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장점을 가진 현명하고 선량하며 충직한 인사들로 조정 업무를 체계적으로 잘 처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요숭의 공헌이 가장 두드러졌다. 현종은 그를 경성으로 불러들여 재상에 임명하였으며, 그는 곧바로 현종에게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어진 정치를 베풀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친인척과 내시를 정사에 관여하지 않게 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인다는 것 등이다. 현종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였다. 요숭은 재상이 된 후에 권력가들을 제압하고 승려와 사찰을 줄이는 한편,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현종의 조정 정비를 도와 상벌을 엄정하게 시행하는 등 중종(中宗) 때부터 지속된 사회적 혼란을 안정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국을 구제한 재상'이라 일컬어졌다.

 이 시기에는 현종 또한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 재상 한휴와 소숭(蕭崇)이 함께 조정을 관장하고 있었을 때, 정직한 성품의 한휴는 현종의 과실을 보면 언제든지 직언을 올렸으며, 소숭은 그와 반대로 항상 현종에게 순종하였다. 한번은 현종이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그를 모시고 있던 내시가 "한휴가 재상이 된 후로 폐하께서 여위어졌습니다. 어찌하여 그를 파면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현종은 엄숙하게 말하였다.

"나는 여위어졌어도 천하의 사람들은 살쪘다. 소숭은 업무를 보고하러 와서 오로지 내 말에 순종하지만, 그가 돌아간 후에 내 마음은 전혀 편하지가 않아. 한휴는 항상 나와 논쟁을 벌이지만 그가 돌아간 후에는 오히려 내 마음이 아주 편해지고 잠자리도 평온해져. 내가 한휴를 등용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 내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융기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정치적 폐단을 개혁하여 사회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당왕조의 경제와 문화는 고도로 발전하여 '개원성세(開元盛世: 개원 시기의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를 거둔 후에 현종은 자만에 빠져 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하였다. 과거의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거만하고 나태한 인간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그는 대신들의 충언을 듣기는 커녕 짜증을 내었으며, 오로지 자기의 비위를 맞추며 순종하는 사람을 중용하였다. 이임보(李林甫)는 무식하고 무능한 간신으로 아무런 재능도 없었지만 아첨에는 뛰어났다. 그는 황제의 후궁, 내시들과 결탁하여 수시로 현종의 동향을 살피면서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현종이 그와 어떤 일을 논의할 때면 그는 항상 아양을 떨면서 현종을 기뻐게 해 주었다. 이에 현종은 유능한 재상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를 재상에 임명하였다. 교활하고 음흉한 이임보는 19년간 재상을 역임하면서 정직하고 유능한 대신들을 배척하고 간사한 소인배들을 중용하였다. 또 현종에게 정보를 차단하고 국정을 전횡했다.

 

현종은 61세 때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여, 그녀의 두 오빠에게 관직을 주고, 세 언니를 부인(夫人)에 책봉했으며, 그녀의 먼 친척 오빠 양국충(楊國忠: 원명 양검<楊劍>)을 당상관에 앉혔다. 현종은 조회에도 나가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양귀비와 유희를 즐기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사치와 탐욕을 충족시켜 주었다. 한번은 양귀비가 신선한 여지(荔枝)를 먹고 싶어 하자 현종은 영남(嶺南: 광동과 광서 일대)의 관리들에게 특명을 내려 각 역참에서 빠른 말로 그것을 이어받아 급히 장안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져온 여지는 양귀비가 먹을 때까지도 붉은 빛과 향을 잃지 않아 아주 신선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음악과 춤에 능했는데, 현종은 대시인 이백(李白)을 궁궐로 불러들여 그녀를 위해 가사를 쓰도록 하였다. 얼마 후 궁궐의 부패한 모습에 불만을 품은 이백은 양귀비와 내시 우두머리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사서 경성을 떠났다.

이임보가 죽은 후 양국충이 그 뒤를 이어 재상에 임명되었다. 양국충도 간사한 소인배였기 때문에 사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사람을 등용하고 일을 처리하였다. 이임보가 정사를 맡고 있을 때, 현종에 의해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성 서남), 평로(平盧: 지금의 요녕성 조양현<朝陽縣>) 겸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서남) 절도사에 발탁되었던 북방 유목민족 출신 안록산(安祿山)은 신임이 두터웠다. 안록산은 몸집이 뚱뚱하고 배가 볼록 튀어나왔었다. 한번은 현종이 그에게 농담조로, "그대의 배가 그토록 큰데 안에 뭐가 들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오직 폐하께 충성을 다하려는 충심이 가득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한 현종은 그에게 국방을 맡기고 양귀비에게 수양아들로 삼게 했다. 양국충과 안록산은 각자 더 많은 총애를 받으려고 서로 다투면서 시기하여 갈등이 깊어갔다. 안록산은 자주 수도 장안(長安)을 출입하면서 병력 부족으로 장안의 방위가 허술한 것을 알고 범양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병기와 식량을 비축하여 당왕조를 탈취할 준비를 하였다. 신하들은 안록산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현종은 믿지 않았다. 안록산이 범양의 장수 32명을 교체하고 현종의 소환을 거부하자, 그제서야 현종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지만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은 양국충 토벌을 기치로 삼고 15만 대군으로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경성을 향해 남진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현종은 설마하고 믿지 않았으나 반란을 알리는 급보가 계속해서 올라오자 그제서야 깜짝놀라 허둥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양국충은 장수들이 공을 세우면 자신에게 불리해질까봐 현종에게 엉터리 명령을 내리게 하였으며 이로써 당나라 군은 안록산이 이끄는 반란군에 번번이 참패하였다. 반란군은 계속해서 낙양(洛陽), 동관(潼關)을 점령하고 곧바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현종은 양국충의 권유를 받아들여 양귀비 등과 함께 사천(四川)으로 도피하기로 하고, 각 현마다 사람을 보내어 현종 일행이 가는 길에 접대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함양(咸陽) 망현궁(望賢宮)에 이르렀을 때 그곳 현령은 이미 도망가 버려서 음식을 제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종이 백성들에게 음식을 바치라고 명령을 하자, 백성들은 수수와 콩 등으로 만든 음식을 바쳤으며, 그것을 몇 입 먹은 현종의 두 눈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곽종근(郭從謹)이라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수레 앞으로 나아가 현종에게 말했다.

"안록산이 야심을 품은 것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닌데, 폐하께서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재상 송경(宋璟)이 자주 직언을 올리면 폐하께서 그것을 잘 받아들여 천하가 태평해졌지만, 최근들어 조정엔 충신이 없고 아첨하는 소인배들만 무성하여, 폐하께선 그들에게 둘러싸여 궁밖의 상황을 듣지 못하셨습니다. 저희같은 평민들은 시골에 살아도 천하가 혼란에 빠질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폐하를 뵙고 말씀드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현종은 크게 탄식하면서, "내가 너무 어리석었구나. 그러나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있으리오."라고 하였다.

궁을 떠난지 3일째 되던 날 피난행렬이 마외역(馬嵬驛: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서쪽)에 이르렀을 때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양국충이 권력을 전횡하여 나라를 망쳤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에 진현례(陳玄禮) 등이 양국충의 말을 가로막고 군량미를 내놓으라고 거세게 항의하자 양국충이 놀라서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 때를 틈타서 그들은 "양국충이 모반을 하려 한다"고 고함지르면서,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목을 베어 죽인 다음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목을 역문에 내걸었다. 그런 다음 극도로 흥분한 병사들은 현종과 양귀비가 쉬고 있던 역관을 둘러싸니, 살기등등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종은 상황을 살피고 들어온 고력사에게 대단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어사대부 위방진(魏方進)과 동평장사(同平章事) 위견소(韋見素)를 보내 그들을 설득하게 했다. 그러자 분노한 병사들이 위방진을 죽이고 위견소에게 폭행을 가했다. 고력사는 현종에게 직접 나가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으며, 현종은 체면도 버리고 나와서 그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병사들이 좀처럼 해산하려 하지 않자 현종은 다시 고력사를 보내어 그들의 요구를 물어오게 하였더니 진현례가 이렇게 대답했다.

"양국충이 모반을 꾀하다 피살된 마당에 양귀비도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폐하께서 그녀를 사형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리시게 하십시오!"

 

고력사가 이 말을 아뢰기 곤란하다고 하자 병사들은 크게 술렁대면서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더 이상 현종을 호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고력사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고력사는 황급히 도망쳐서 현종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이 말을 듣고 아연실색한 현종이, "귀비는 줄곧 깊은 내궁에 있으면서 바깥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무슨 죄로 죽여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고력사는 "귀비에게는 죄가 없지만, 병사들이 양국충만 죽이고 귀비를 살려둔다면 어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주셔야만 폐하께서도 안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종이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현종을 호위하고 있던 경조사록(京兆司錄) 위악(韋鍔)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었다.

"군중의 분노는 막을 수 없습니다. 폐하의 안위가 한 순간에 달려 있으니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이때 바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고력사가 황급히 아뢰었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옵니다. 폐하께서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니 그들이 직접 양귀비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도 더 이상 귀비를 보호할 수가 없구나. 그대가 나의 뜻을 전하고 자진하라 명하시오."

 

현종의 성지를 받은 양귀비는 놀라서 땅바닥에 쓰러졌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울면서 현종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고력사는 양귀비를 현종에게 데려갔으며, 양귀비는 현종에게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고 울면서 "폐하 옥체 보중하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현종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고력사는 병사들이 쳐들어올까 염려되어 급히 양귀비를 불당으로 데리고 가서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한 다음, 다시 불당 밖 배나무 아래로 데려가서 비단 조각을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양귀비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신첩 폐하와 영원히 이별합니다."라고 말한 후 목을 매어 죽었다. 근래에 유평백(兪平伯)은 양귀비의 죽음을 고증하면서, 그당시에 양귀비가 죽지 않고 도주하여 여도사(女道士: 도교의 여승)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나라 때의 여도사는 기녀와 같았고 그녀들이 거주하던 암자는 기원과 같았는데, 암자에 들어간 양귀비는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에도 현종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는 양귀비가 살짝 빠져나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양귀비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병사들은 뇌성같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현종을 보호하면서 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태자 이형(李亨)은 백성들의 권유로 그곳에 잔류하면서 조정 업무를 주관하였다. 마외파에서 남은 병사들을 정비한 이형은 북상하여 영무(靈武: 지금의 영하<寧夏> 영무현 서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한 다음 현종을 태상황으로 삼았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은 757년 12월 장안으로 돌아와서 궁안의 감로전(甘露殿)에 거처하였다. 그는 지난날의 영예를 그리워하면서 현재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슬픔에 잠겨 번뇌하다가 점점 병이 들어갔다. 762년 4월 병세가 위중해진 그는 양귀비를 더욱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방사(方師)를 불러서 도술로 양귀비의 혼을 불러오게 하여 그녀와 상봉하였다고도 한다. 죽기 하루 전날 그는 아주 처량한 곡조로 옥피리를 분 다음, 궁애(宮愛)라는 궁녀를 불러 그의 몸을 씻게 하고 옷을 갈아입히게 하였다. 그날 저녁 그의 방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날(甲寅日) 새벽에 궁애가 그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두눈을 감고 있었으며 사지는 뻣뻣해 있었다.

현종은 중국의 음악, 무용, 희곡의 발전에 중요한 공현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무와 연극을 매우 좋아하였다. 한번은 그의 할머니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이 성대한 연회를 열었을 때, 그는 군중들 앞에서 <<장명녀(長命女)>>를 공연하고 많은 신하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는 연예인들과 사귀면서 법곡(法曲)을 열심히 연구하여 음률의 기묘함을 터득하기도 하였다. 평왕(平王)으로 있던 시기에 그는 산악(散樂) 극단을 만든 적이 있으며, 황제에 오른 후에도 희곡 활동 센터를 설치하고 이원(梨園)을 이 센터의 소재지로 삼았다. 따라서 역대 희곡 연예인들은 모두 현종을 이원조신(梨園祖神) 또는 희곡성인이라 존칭하였다.

이융기가 죽은 후 그의 묘호를 현종(玄宗)이라 하고, 시호를 명황(明皇)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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