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는
명(明)나라 제13대 황제로 이름이 주익균(朱翊鈞: 1563 ~ 1620)이고, 목종(穆宗)의 셋째 아들이다.
목종이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하여 48년간 재위하였으며
58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북경시
13릉)에 있다.
주익균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6세 때 그는 목종이
궁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앞을
가로막으며, "아바마마께서는 천하의 주인이신데
홀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빨리 달리시다 잘못하면 큰일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목종은 크게 기뻐하며 당장 말에서
내렸으며, 그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1572년 윤
3월에 목종이 병사하자 그는 동년 6월 갑자일(甲子日)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만력(萬曆)"으로
개칭하였다.
신종은
불과 10세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 고의(高儀) 등이 정무를
잘 보좌하였다. 특히 장거정은 신종의 학문을 지도하면서
유능한 대신을 선발하여 그에게 치국의 도리를 교육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
田賦, 丁役 등 여러 세역을 一條로 간편하게 하여 은납제로
징수한 세법)"을 추진하고, 관리들의 행정업무
정돈과 불필요한 인원의 감축, 황하(黃河)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정치적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신종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펴면서 궁궐의 정원을 수축하는
등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주색에 탐닉하여 정사를
팽개쳤다. 게다가 장거정의 죽음으로 개혁이 중단되면서
조정은 또다시 보수적으로 돌아갔으며 국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종은
재물에 눈이 먼 탐욕스런 군주였기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광감세리(鑛監稅吏)에
임명한 후 그들을 사방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해 오게 하였다. 이에 조정 내부에서는
광감세리를 파면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어 당쟁이
끊이지 않았다.
신종의
탐욕으로 극히 부패해진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국고가
탕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1616년(만력
44) 동북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만주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명 왕조는 이미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명의 멸망 이유를 신종에게 있다고
평한다. 1620년 7월 신종은 병이 들어 보름간
식음을 전폐하다 8월 병신일(丙申日)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북경성 북쪽에 있는 명왕조 왕릉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였다. 명대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그중 13명의 왕릉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13릉"이라
일컫는다. 첫번째 발굴 대상으로 정릉(定陵)을 택하여
성공적으로 발굴을 마쳤으니, 이 정릉이 바로 신종
만력황제의 능묘인 것이다.
1년간의
발굴을 거쳐 정릉의 지하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화려하게 단장된 지하궁전에서 3000여점의
귀중한 문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궁전의
발견으로 명왕조의 쇠망이 주색과 재물에 눈이 먼 만력황제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만력황제는
생전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직접 이
지하궁전을 수축할 구상을 하였다고 한다. 정릉은 지하
깊이 27m, 총면적 1195㎡으로 전부 돌로 이루어진 아치형
건축이다.
지하궁전은
전(前), 중(中), 후(後), 좌(左), 우(右) 5개의 크고
넓은 전당(殿堂)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전(中展)에는
한백옥(漢白玉)으로 조각한 3개의 보좌(寶座)가 놓여
있고, 좌전(左殿)과 우전(右殿)에는 관을 놓은 침상만
있고 관은 없으며, 후전(後殿)에는 만력황제와 효단황후(孝端皇后),
효정황후(孝靖皇后)의 관(모형 관)이 놓여 있다. 또
지하궁전 안에는 두 개의 전청(殿廳)이 있는데, 첫
번째 진열장에는 주로 만력황제와 두 황후에 대하여
소개하고 대량의 출토 문물과 일부 모형품을 진열해
놓고 있다. 두 번째 진열장에는 대부분 일상용품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