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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칭기스칸(成吉思汗: 사해를 차지한 강력한 최고 수령이란
뜻)이란 존칭을 얻고 몽고의 첫 번째 정권인 몽고국을 수립하였다.
칭기스칸은
몽고국을 세운 후에 '영토분봉(領土分封)'제 등의 정책과
군사제도, 기초적인 성문법 <자사헤이(扎撒黑)>를
제정하고, 위글 자모를 채용하여 몽고어를 쓰게
하는 등 몽고민족의 형성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칭기스칸은
즉위한 후에 곧바로 대규모 군사 원정을 개시하였다. 1207~1218년
사이에 그는 웨이월(畏兀兒: 고대 후이허족<回紇族>의
후예, 현대 위글족의 조상)과 서요(西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다시 서하(西夏)와 금(金)나라를 공격하여 단번에 금나라의
중도(中都: 지금의 북경시)를 점령하였다. 1219~1225년에
그는 서역 정벌에 올라 화츠즈모(花刺子模: khwarizm,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북서쪽 일대)를 정복하고
인도 등지로 진격하였다. 그는 또 대장 수부타이(速不台)를
파견하여 코카서스산(高加索山: 러시아 남부, 카프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산. Caucasus<코카서스> 또는 Kavkaz<카프카스>라고
함)을 넘어 카러카하(喀勒喀河:
지금의 돈강<Don>) 지역으로 진격, 러시아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1226년 군대를 돌려 다시 서하를 정벌, 몽고
정권의 판도는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1227년
여름, 칭기스칸은 몽고 대군을 거느리고 서하의 도성을
공격하였다. 그해 7월 서하 멸망을 눈앞에 둔 칭기스칸은
병에 걸려 한기와 고열, 기침에 시달렸다. 그는 여러 아들
중에서도 셋째 아들 오고타이(窩闊台)를 칸으로 옹립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서하와 금나라를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긴 후, 1227년 8월 25일 청수행궁(淸水行宮: 지금의 감숙성
육반산<六盤山> 아래의 청수현 경내)에서 병사하였다.
칭기스칸은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몽고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몽고족을 중국과 세계의 역사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중국 북부의 서하와 서요를 멸망시켜 광활한 원(元)나라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중국의 역사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서역 원정과 남방
정벌의 과정에서 행한 도살과 약탈은 백성들에게 심각한
재난을 안겨다 주었다.
칭기스칸이
죽은 후에 부하들은 '죽음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영구를 호송하여 몽고 본토로
돌아갔다. 그러나 의외로 그의 죽음은 외부로 신속히 전파되어
영구를 호송하던 병사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도중에 만나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 칭기스칸의 유해가 안장된 후에 그
주위에는 수목이 빽빽히 자라나 그의 묘지는 무덤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한 삼림을 이루었다. <<원사(元史)
태조기(太祖紀)>>의 기록에 의거하여 기련곡(起輦谷)에
안장되었다는 것만 알 뿐, 기련곡이 도대체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 후 칭기스칸의 후손도 같은 숲 속에 여러
명이나 묻혔다.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무덤에서 제사지내는
풍속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흰천막
8개('팔백실<八白室>')를 그의 상징적인 무덤으로
삼고 대대로 그것을 지키면서 성대하게 제사지냈다. '팔백실'은
알타이산 북쪽, 하다이산(哈岱山) 남쪽의 어터커(谔特克: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알타이산과 컨터산 일대의 고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옛날에 몽고족은 유목민족으로 거주지를
자주 옮겨다녔기 때문에 '팔백실'도 그때마다 옮겨야 했다.
명대(明代) 천계(天啓) 연간에 '팔백실'을 지키던 몽고족
얼둬스(鄂多斯) 부락이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얼둬스고원으로
이주하면서, '팔백실'도 얼둬스고원의 이커자오맹(伊克昭盟)으로
옮겨왔다. 그후 다시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이진훠뤄기(伊金霍洛旗:
몽고어로 황제의 능이라는 뜻)의 간더리(甘德利) 초원으로
옮긴지 3백여년이 지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정부에서는
'팔백실'을 다시 수축하여 유적지로 조성하였다.
쿠빌라이(忽必烈)가
국호를 원(元)이라 고친 이후 칭기스칸을 원 태조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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