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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소수민족

서 북 지 구

회흘족(回紇)

  

회흘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 북방의 고대 유목민족이다. 그들의 선조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정령(丁零)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남북조 시기에는 그들을 '고차(高車)' 또는 '칙륵(勅勒)' · 철륵(鐵勒)"이라 불렀다. 철륵은 많은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원흘(袁紇)' 부락이 후대 회흘족의 직계로서, 수왕조 시기에는 '위흘(韋紇)'이라 일컬어졌다.

회흘인들은 5세기에 악이혼하(鄂爾渾河) 서북에서 얼마간 유목생활을 하다가 토랍하(土拉河) 이북 및 천산(天山) 북부로 이주하였다. 7세기 초엽에 그들은 다시 색릉격하(色楞格河) 일대로 이주하였다. 당시까지 씨족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회흘족은 세력이 미약하여 강대한 돌궐(突厥)에 종속되어 있었다. 돌궐은 회흘과 철륵의 여러 부락에 대하여 갖은 수단을 다하여 잔혹하게 통치하면서 그들을 징발하여 사방의 영토 확장에 동원하였다. 605년에 이르러 회흘과 철륵의 여러 부락에 대한 돌궐의 통치는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상황에 도달하였다. 회흘은 부고(固) · 동라(同羅) · 발야고(拔野古) 등의 부락과 연합하여 항거함으로써 마침내 돌궐의 통치에서 벗어나 점점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627년 회흘의 우두머리 보살(菩薩)은 5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돌궐의 10만대군을 격파하여 북방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얼마 후 보살은 스스로 힐리발(署利發)이라 칭하고 토랍하 유역에 정권을 세웠다. 628년 설연타부의 세력이 나날이 강성해지자 회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설연타에 귀속되었다.

629년 회흘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646년 회흘은 설연타부의 내란을 기회로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설연타 정권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관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회흘의 우두머리 토미도(吐迷度)는 스스로 칸이라 칭했다. 이와 동시에 당왕조는 회흘 지역에 한해도독부(瀚海都督府: 지금의 몽고인민공화국 주이마대하 朱爾馬台河 유역)를 설치하고 토미도를 회북대장군(懷北大將軍) · 한해도독(瀚海都督)에 임명하였다. 7세기 후반에 동돌궐이 세력을 만회하고 일어나 정권을 세우자 회흘은 다시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일부의 회흘인들은 당왕조 관할의 하서 감(甘) 양(凉) 지구(지금의 감숙성 장액 張掖 무위 武威 일대)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초기에 회흘의 우두머리 골력배라(骨力裴羅)는 다른 부락과 연합하여 내란으로 혼란해진 돌궐을 다시 멸망시켰다.

당 천보 3년 당왕조는 골력배타를 회인칸(懷仁可汗)에 책봉하였다. 회인칸은 오덕건산(烏德 山: 지금의 악이혼하 鄂爾渾河 상류 항애산 북산 杭愛山 北山)과 악이혼하(鄂爾渾河) 사이에 도읍을 세웠다. 이 때에 회흘의 통치 지역은 동으로 실위(室韋: 지금의 아르군강 일대), 남으로 고비사막, 서로 금산(金山: 지금의 알타이산)에 이르러 옛날의 흉노 지역을 전부 차지하였다.

회흘 정권은 당왕조에 귀속된 후에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회흘은 처음에는 주로 돌궐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뒤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여 외재상문위(外宰相門位) · 내재상문위(內宰相門位)를 설치하고 도독(都督) · 사마(司馬) · 장군(將軍) 등의 관직을 두었다. 회인칸 때부터 회흘은 새로운 칸이 등극할 때마다 당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회흘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당왕조는 전후 세 번에 걸쳐 공주(영국공주 寧國公主 · 함안공주 咸安公主 · 태화공주 太和公主)를 회흘의 칸에게 시집보냈다. 회흘도 그에 대한 보답으로 두 번이나 출병하여 당나라 군대를 도와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長安) · 낙양(洛陽)과 하북을 수복하였다.

희흘인들은 기본적으로 계절에 따라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유목생활을 하였다. 회흘은 당왕조에 귀속되어 있던 시기에 경제적으로 빠른 발전을 이룩하였다. 회흘인들은 그들의 말을 중원지역의 비단 찻잎과 교환하였는데, 가장 많을 때는 연간 10여만필의 말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 회흘인들은 경제 수준의 향상으로 도시를 건설하여 반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회흘인들은 초기에 샤머니즘을 숭배하였으나, 8세기 중엽에 마니교의 전래로 모우칸(牟羽可汗)은 그것을 국교로 정했다. 9세기 초엽에 회흘의 통치자는 마니교를 중원지역으로 전파하였다. 이로부터 마니교는 황하와 장강 유역 일대에서 점점 유행하게 되었다. 회흘의 언어는 돌궐어계에 속하고, 문자는 돌궐문을 사용하였다. 788년 회흘의 칸은 상소를 올려 '흘(紇)'자를 '골()'자로 바꿔주기를 청하였다.

당 문종(文宗) 연간에(836 ~ 840) 끊이지 않은 자연재해로 무수한 가축이 죽어 생산력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더욱이 칸과 귀족 대신 사이의 갈등과 내분으로 회골의 국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840년 회골 서북부의 힐알사인들이 이 때를 틈타 회골을 공격하였는데, 이로써 회골의 칸은 피살되고 정권은 붕궤되어 대부분의 회골인들은 잇달아 타지로 이주하였다. 그 중에서 세 번에 걸쳐 서쪽으로 향한 대규모 이동의 영향이 가장 컸다.

감숙성 하서 회랑 일대로 이주한 회골인들은 '하서회골'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감주(甘州: 지금의 감숙성 장액 張掖)에 정착한 회골인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으며 그들을 '감주회골'이라 한다. 하서회골은 처음에는 토번(吐蕃) 정권에 귀속되었으나, 당대 말기에는 다시 하서 지역의 수령 장의조(張義潮)에게 귀속되었다. 10세기 초에 감주회골은 봉건정권을 수립하고 하서의 각 회골 부락을 통치하였다. 당말 오대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감주회골은 중원의 왕조와 줄곧 우호 관계를 맺어 왔다. 오랜 역사 발전 속에서 하서회골 중의 일부는 인근의 각 부족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 융화되어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유고족(裕固族)의 선조가 되었다.

총령 서쪽 지역으로 이주한 다른 한 갈래의 회골인들은 '총령서회골'이라 한다. 그들은 10~12세기에 그곳에 캐라칸(喀喇汗) 왕조를 세웠다. 10세기에 칸국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이슬람교가 동쪽으로 전래되어 중국 신강 등지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그 지역의 많은 민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신강 토노번(吐魯蕃) 지역 일대로 이주한 세 번째 갈래의 회골인들은 '고창회골(高昌回 )' 또는 '서주회골'이라 한다. 고창회골은 얼마 후 그 지역에 정권을 수립하고 중원 지역과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주변의 소수민족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 융화되었으며, 그들은 위글족(維吾爾族)의 선조가 되었다. 이외에도 일부의 회골인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당왕조에 귀순하였는데, 당나라 정부에서는 그들을 내지로 이주하도록 허락하고 식량을 원조하였다. 원래의 지역에 남아있던 소수의 회골인들은 실위(室韋) · 해(奚)와 힐알사 등의 부족에 강제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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