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에
의하면 만주족의 조상은 2천여년 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 물길(勿吉)
·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조
· 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 · 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 흑수(黑水) ·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 ·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진국(震國)'을 건국한 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들에게
도독(都督) ·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들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흥성을 거듭하던 흑수
말갈부도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를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 도지휘사(都指揮使) · 지휘첨사(指揮僉使) · 천호(千戶) · 백호(百戶) ·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 인신(印信) · 의관 ·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 해서(海西) · 동해의 3부로 나누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야인여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누르하치는 군사적 · 정치적
· 생산적 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누르하치는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후금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 만주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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