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오손은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활동한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이다. 오손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흉노족설 · 돌궐족설 · 동이란족설 등 다양한 설이 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일치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엽에 오손족은 월지(月氏)와 함께 지금의 감숙성 경내의 돈황(敦煌)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으며, 그들의 북부 지역에는 흉노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의 기록에 의하면, 오손의 왕 난두미(難兜靡)는 월지의 공격으로 피살되고 국토는 모두 월지에게 넘어갔다. 이 때에 흉노의 모돈 선우(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재위)는 갓 태어난 난두미의 아들 엽교미(獵驕靡)를 데리고 가서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으며, 그로 인하여 성인이 된 엽교미는 나중에 다시 자신의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오손의 왕 엽교미는 자기를 살려준 흉노 선우의 은덕을 잊지 않았지만, 흉노의 보호를 너무 오래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건(張騫)이 한 무제의 명을 받들고 와서 그에게 옛 영토인 돈황과 기련산으로 돌아가서 한왕조와 함께 강대한 흉노에 대응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지만, 한왕조의 부강함을 알고난 후에는 한왕조와 혼사를 맺고 그 힘을 빌어 자신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이에 한 무제는 왕족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삼아 엽교미에게 시집보내고 매우 많은 예물을 보냈다. 흉노도 그 소식을 들은 후에 오손과 혼사를 맺기 위해 딸을 엽교미에게 시집보냈다. 기원전 121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한나라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농서(陇西) 일대에서 흉노를 대파하자 흉노 혼야왕(渾邪王)은 투항하였다. 그 후 10년간 한 무제는 농서에 주천(酒泉) · 무위(武威) · 장액(張掖) · 돈황 등 네 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 한왕조와 오손의 압박이 점점 거세지자 흉노는 차사후국(車師後國)과 연합하여 오손을 공격하였다. 한왕조는 기마병 15만을 선발하고 5명의 장수에게 그들을 거느리고 가서 오손을 구원하도록 하여 기원전 71년에 흉노를 대파하였다. 기원전 70년에서 기원전 69년 사이에 정령(丁零) · 오환(烏桓) · 오손 등은 흉노가 천재와 인재를 만나 그 세력이 매우 쇠약해진 틈을 타서 연합으로 공격하여 흉노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속국에서 해방되었다. 기원전 53년부터 오손에는 대소곤미(大小昆彌) 두 개의 왕통이 출현하여 지역을 분할 통치하였다. 그 후 그들 양자 사이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아 국세가 매우 쇠약해졌다. 서기 5세기 초엽에 오손은 연연족(蠕蠕族)의 침입을 받아 서쪽 총령산(葱嶺山)으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연족에게 멸망되었다.
|
||||||||||||||
|
|
◈ ◈ ◈ 현재 페이지는 [중국고대소수민족] - [오손족] 입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