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월지는 중국의 서북지역에 살고있던 고대민족의 하나로 '월지(月支)' · '대월지(大月氏)'라고도 한다. 대체로 지금의 감숙성 난주(蘭州) 서쪽에서 돈황(敦煌)에 이르는 하서(河西) 주랑(走廊)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일찍이 전국 초기에 월지는 이 지역 내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일치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진대부터 한대 초기까지 월지의 세력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월지는 몽고고원 동부의 동호족과 함께 그들 사이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흉노족에게 양쪽에서 압박을 가하였다.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흉노의 우두머리는 일찍이 자신의 장자를 월지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진왕조 말기에 월지에 인질로 있던 흉노 선우의 아들은 월지를 탈출하여 아버지를 시해하고 스스로 모돈(冒頓) 선우가 되었다. 기원전 177년부터 이듬해까지 모돈은 군대를 일으켜 월지를 공격하여 승승장구하다가 마침내 월지를 서쪽, 지금의 신강 이려하(伊犁河) 유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때 서쪽으로 이주한 월지를 '대월지(大月氏)'라 하고, 동쪽으로 이주한 월지를 '소월지(小月氏)'라 한다. 월지는 서쪽으로 이주한 이후 흉노의 한 갈래인 오손부(烏孫部)에 귀속되었다. 오손의 왕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대월지를 공격하여 대월지를 이려 지역에서 다시 서쪽으로 몰아내었다. 여러 차례의 고난을 겪은 대월지는 박트리아(巴克特拉)를 도읍으로 삼고 대하(大夏)를 귀속시킨 나라를 세웠다. 월지인들이 하서에서 이려하 유역으로 이주해 왔을 때에는 모두 유목을 위주로 하였으나, 대하를 함락시킨 후에는 대부분 정착하여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비교적 발달된 수리관개 체계도 가지고 있었다. 대월지 왕국의 도시와 상업은 매우 발달하였다. 특히 서역 실크로드의 남북 두 통로가 총령(葱嶺)을 넘어 대월지 경내로 들어옴으로써 대월지는 고대에 유라시아 경제 문화를 연결시켜 주는 요지가 되어, 중국과 서양의 경제 문화 교류 발전에 중요한 중개 역할을 하였다. 5세기 후반기에 대월지 왕국은 엽달(엽=口+厭, 달=口+達 )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은 결코 즉시에 사라지지 않았으니, 6세기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소무구성(昭武九姓)'은 월지인의 후예라 자처했다. 서쪽으로 이주한 소월지인들은 기련산(祁連山) 이남 지역으로 옮겨가 오랫동안 청해강인(靑海羌人)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그들을 황중월지호(湟中月氏胡)라 칭하기도 한다. 한대에 이르러 하서와 황중(湟中) 지역을 개발하게 되자 소월지는 다시 동북으로 이주하여 황중 영거(令居: 지금의 감숙성 영등 永登)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여기에서 17개의 부락과 날랜 병사 9000여명을 보유하고, 장액(張掖) 일대에 수백호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의종호(義從胡)라 칭해졌다. 하서 금성(金城: 지금의 감숙 난주 蘭州)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 중에는 소월지 병사가 많았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소월지는 모두 강족에게 융화되었다.
|
||||||||||||||
|
|
◈ ◈ ◈ 현재 페이지는 [중국고대소수민족] - [월지족] 입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