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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계책을 세우게
된다. 조숙대(趙叔帶)의 반론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적이 있는
괵석보(虢石父)가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옛날
서쪽의 만족(蠻族)이 강성하여 자주 수도를 침범하였는데, 그들의
급습을 방비하기 위하여 일찍이 20여개의 봉화대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봉화에 불을 붙여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
부근의 제후국에서 구원병을 보내줍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여러해
동안 천하가 태평하여 그것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왕후와 함께 여산(驪山)으로 가셔서 봉화를 올린다면 그것을 보고
주변의 제후국에서 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이 급히
달려와서 헛걸음치게 한 다음 그 제후들을 놀린다면 왕후께서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왕은 과연 묘책이라 생각하고 포사를 데리고 여산으로
갔다. 여산은 수도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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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봉화(驪山烽火)
유왕은
포사와 함께 여산에 도착한 이후 저녁이 되자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당시에 삼군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鄭)나라의
제후 희우(姬友)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황급히 행궁(行宮)으로
달려가서 유왕을 만류하였지만 유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왕의
명령으로 봉화가 오르자 그것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수도
부근에 있던 제후들은 밤중에 봉화가 올랐다는 급보를 듣고 수도
호경이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것으로 판단, 급히 지원군을 편성하여
달려왔다. 이때 유왕과 포사는 여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후들의
군대가 집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새벽
무렵 왕실을 구원하기 위한 제후들의 군대가 사방에서 달려와 여산
아래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비록 밤새워 달려왔지만 그러한 피로도
잊은채 오로지 왕실을 구하겠다는 충성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여산 아래에 도착한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들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자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던 유왕은 크게 만족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무런 외침이 없었으나 내가 심심해서 한번 봉화를
올려본 것뿐이오. 그러니 모두들 원대복귀하여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말을 들은 제후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지만 사실을
알고난 이후에는 허탈감에 빠져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본 포사는 비로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유왕은 웃음이 담겨있는 포사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여산봉화'의 고사이다. 그후
유왕은 그러한 계책을 건의한 괵석보에게 상으로 황금 1천냥을 하사했다.
포사의
아름다운 웃음을 본 이후 유왕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서 봉화를 자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원전
771년 유왕은 신(申)나라에 유배시켰던 태자 희의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나라의 제후는 원래 유왕의 장인이자 희의구의
외조부였다. 그는 차마 자기의 외손자를 죽일 수가 없었기에 유왕에게
그 일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옛날
하(夏)왕조의 걸왕은 말희(妺喜)를 총애하여 망했고, 상(商)왕조의
주왕은 달기를 총애하여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포사를
총애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옹립함으로써 부부의 정은 물론
부자의 정도 끊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명령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이 나라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유왕은
이것을 다 읽어보기도 전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격분하였다. 그는
신속하게 명령을 다시 내려 신나라 제후의 작위를 박탈한 다음 그를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신나라의
제후는 단독으로 중앙정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호경 부근의 만족(蠻族) 견융부락(犬戎部落)의 추장과 동맹을 맺었다.
신나라의 제후는 견융의 추장에게 자기의 외손자가 왕위를 찬탈하기만
한다면 호경의 모든 금은보화와 많은 남녀를 노예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에 견융의 추장은 즉시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였으며, 신나라의 군대도 그와 동시에 호경으로 향했다.
신나라와
견융부락이 연합하여 공격해왔지만 유왕은 거기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조그만 제후국과 오랑캐 부락이 아무리 연합하여도 결코
그들이 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주나라의 적수는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견융부락의 군대가 호경성 아래에 다달았을 때 유왕은
봉화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삽시간에 봉화의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밤새워 달려와야 할 제후국들의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봉화의 불길을 본 제후들은 지난번에
유왕과 포사에게 속았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그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왕은 유명한 이솝우화의 목동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유왕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호경에 미리 숨어있던
신나라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어 젖히자 견융부락의 군사들은 손쉽게
호경에 진입할 수 있었다. 크게 당황한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여산으로 탈출하였지만, 뒤따라온 견융의 군사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견융족에게 붙잡여 목이 달아났다. 그러나
견융의 추장은 포사를 보고는 그 미모에 반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이후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만족(蠻族)의
수중으로 잡혀간 최초의 중국 황후로 기록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나라의 제후가 견융부락의 황음무도한 행위에 분개하여
진(晋), 위(衛), 진(秦), 정(鄭)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을 물리치고
포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포사는 신나라의 제후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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