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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북방의 통일전쟁을 하나씩 수행해나갔다. 그는
먼저 원소(袁紹)를 물리치고 여포(呂布)를 죽인 다음 유비(劉備)와 장수(張繡)를
몰아내고 황하와 회수(淮水)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점거하였다. 이로써
그는 황하 이북의 원소와 필적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헌제
건안 5년(200), 원소는 10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조조는 만여명의
병력으로 관도(官渡: 지금의 하남성 중모<中牟> 경내)에 진을 치고 출전을
준비했다. 두달 사이에 원소는 조조의 군대가 방어하던 여양(黎陽)을
점령한 후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경내)를 포위하였다. 조조군은 먼저 서쪽으로 향하여 북으로 황하를
건널 태세를 갖추고 원소군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한 다음, 신속하게 동쪽으로
진격하여 원소군의 장수 안량(顔良)을 죽이고 백마의 포위망을 해체시켰다.
그후
백마에 있던 군사들을 전부 남쪽으로 이동시켜 원소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중간에 매복을 설치해두고 원소군의 대장 문축(文丑)을
죽임으로써 원소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원소는 첫전투에서 패한
후에도 계속 남하하여 병력의 우위만 믿고 조조군을 격파하려 하였다.
조조군은 관도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원소군과 대치하였다. 이해 10월,
조조는 원소를 배반하고 귀순한 모사 허유(許攸)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접 정예병 5천을 이끌고 원소군의 진영 북쪽에 있는 식량보급 기지
오소(烏巢)를 기습하여 식량을 전부 태워 버렸다. 이때 원소는 오소가
피습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지 기마병만 파견하여 돕도록 하고 본대는
여전히 조조군을 일거에 대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오소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소군의 장수 장합(張郃)은
조조군에 투항하였다. 이에 조조군은 혼란에 빠진 원소군을 맞이하여
크게 물리쳤다. 원소는 800여명의 기마병과 함께 황하를 건너 달아나고
나머지는 거의 섬멸되었다. 이에 조조는 계속하여 기주(冀州)·청주(靑州)·병주(幷州)를 점령한 후 유주(幽州)로 진격하였다.
헌제
건안 7년(202), 원소가 죽자 그의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원담은 조조와의 싸움에서 피살되고, 원상과 원희(袁熙)는
오환(烏桓: 지금의 기동冀東 요녕遼寧 일대)으로 달아나 재기를 노렸다.
조조는
원소의 잔여세력을 소탕하여 북방의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오환을 정벌할
준비를 하였다. 건안 12년(207) 여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무종(無終:
지금의 천진<天津> 계현<蓟縣>)으로 출동하여 오환을 공격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오환군이 경계를 늦춘 틈을 타서 조조는 그곳의 명사(名士) 전주(田疇)의
안내를 받으며 비밀리에 진격하여 백랑산(白狼山: 지금의 요녕성 카라신
왼쪽의 몽고족 자치현 경내)에서 오환군을 대파하고 유성(柳城)을 점령하였다.
원상과 원희는 수천명의 기마병과 함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도망갔다. 이때 누군가가 내침김에 공손강을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내놓도록 하면 될터이니 병사들을
귀찮게 할 것까지는 없다."
얼마후
과연 공손강은 원씨 형제의 머리를 조조 진영에 보내왔다. 이때에 이르러
조조는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하였다.
건안
13년(208) 조조는 승상에 올라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와 강동(江東)의 손권(孫權)을 물리치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코자
하였다. 9월에 조조군은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성 경내)에 이르렀다.
이때 유표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유종(劉琮)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유표에 의지하여 번성(樊城: 지금의 호북성 경내)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는 황급히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여
장판(長坂: 지금의 호북성 당양<當陽> 경내)에서 유비군을 대파하고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을 점령한 후 대군을 이끌고 강동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에서 내려온 조조의 군대는 수전과 남방의 기후에 익숙지 않았고,
새로 편입된 형주의 병사들은 아직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잇다른 승리로 다소 거만해진 조조는 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는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화공(火攻)에 대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고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당시의 중국은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안
16년(211) 조조는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건안 18년(213)년 위공(魏公)에 책봉되었다.
건안 20년(215) 한중(漢中)의 장노(張魯)를 항복시키고, 그 이듬해(216)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차례 손권을 공격하였지만
모두 무위로 끝났으나, 이때부터 조조의 위나라는 회남(淮南) 지역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건안
24년(219) 한중(漢中)에 이르러 조조는 병력을 형주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손권과 유비의 연맹을 갈라놓고 그들을 격멸하려는 작전에 착수하였다.
손권을 교사하여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를 죽이도록 한 다음
불리했던 형주전선에서 신속히 우위를 되찾았다. 건안 25년(220) 정월,
조조군의 위세가 한창 드높아갈 때 조조는 낙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0년
정월 조조는 병세가 심각해지자 비밀리에 측근들을 불러놓고, 그가 죽은
후 무덤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장할 때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후궁들에게는 진귀한 향을 나누어준 다음 부지런히
신발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자급자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자일(庚子日)에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적벽대전 이후에 형성된 위(魏)·촉(蜀)·오(吳) 삼국정립의
국면은 50여년간 지속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위나라의 황제가 된 후에 조조를 무제(武帝)로 추존하였다.
조조는
용병에 뛰어나고 병법에도 정통하였으며, 인재등용이 엄정하고 상벌이
분명했다. 조조의 저서로는 ≪손자략해(孫子略解)≫ ≪병서접요(兵書接要)≫
등이 있다. 특히 그는 ≪손자략해(孫子略解)≫에서 ≪손자≫ 13편을
정리하여 최초의 주석을 가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군사이론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그는 또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현재에도 20여수의 시와
40여편의 산문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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