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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주 요 인 물

난세 의  영웅

영웅인가 간웅인가 - 조조(曹操)

 

 

 ☞  [조조의 무덤은 어디에]   [조조에 대한 평가]

 

[ 조조의 일생 ]

  

 조조(曹操: 155~220)는 한(漢)·위(魏) 시기에 패국(沛國) 초(: 지금의 안휘성 박주<亳州>) 출신으로, 자는 맹덕(孟德)이고 어릴 때 이름은 아만(阿瞞)이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무제기(武帝紀)」에 의하면, 그의 출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알 수 없고, 단지 그의 부친 조숭(曹嵩)은 본래의 성이 하후(夏候)였으나 후에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조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면서도 다소 방탕하여, 사냥과 가무(歌舞)를 좋아하고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조조의 숙부가 그의 품행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형 조숭에게 엄하게 단속하라는 충고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안 조조는 어느날 숙부를 보고 갑자기 땅에 쓰러져 중풍에 걸린 것처럼 하였다. 그의 숙부는 깜짝 놀라 황급히 조숭에게 알렸다. 그러나 조숭이 전갈을 받고 달려왔을 때 조조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하고 있었다. 조숭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조조에게 물었다.

"네 숙부는 네가 중풍에 걸렸다고 말하던데 어찌된 일이냐?"

조조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소자는 본시 아무 병도 없었는데 숙부께서는 제가 미워서 일부러 아버지 앞에서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조숭은 조조의 말을 듣고 이후에는 조조의 숙부가 조조에 대해서 어떤 잘못을 말하더라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더욱 제멋대로 굴면서 가무와 여색에 깊이 빠졌다.

 

조조는 뛰어난 재주와 웅대한 지략을 가졌기 때문에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던 학자 허모(許某)는 조조를 일러, "치세에는 유능한 신하가 될 것이고, 난세에는 간웅이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그러한 조조는 동한 말기(155~220)에 환제(桓帝)·영제(靈帝)·소제(少帝)·헌제(獻帝)의 4대 황제를 거치면서 살았다. 이 시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다.

내부적으로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부패가 극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아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특히 황건적의 난과 동탁(董卓)의 난으로 조성된 할거세력들의 대혼전은 백성들에게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관중(關中) 지역은 백성들이 죽거나 사방으로 흩어져 2~3년 사이에 인적이 끊어졌으며,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먹어 온 마을이 텅 비고 백리 안에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조조는 <호리행(蒿里行)> 시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白骨露于野,      백골이 들판에 흩어져 있고,

     千里無鷄鳴.      천리 안에 닭울음 소리가 없다.

     生民非遺一,      백성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아'

     念之斷人腸.      생각할수록 장이 끊어지는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조조와 같은 영웅이 출현하여 전란을 종식시켜 백성을 구하는 것은 시대적 요구요 역사적 필연이었다. 당시에 일부 지식인들은 부패한 문벌세력의 전횡에 대응하여 국정을 쇄신하려다 대부분 투옥되거나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며,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당고지화(黨錮之禍)'이다. 조조는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문벌세력에 맞서 완강히 투쟁하였다.

동한(東漢)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 조조는 20세에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에 올랐다가 얼마 안 있어 돈구(頓丘: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 서쪽) 현령으로 전임되었다. 중평(中平) 원년(184)에 그는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의 파재(波才)가 이끄는 황건적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제남상(齊南相)으로 승진하였다.

중평 4년(187)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그 이듬해 다시 전군교위(典軍校尉)에 임명되어 병권을 회복하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동한정권은 황건적의 난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중평 6년(188), 동탁(董卓)이 조정에서 권력을 전횡하자 조조는 낙양(洛陽)으로 내려가서 진류(陳留: 지금의 남개봉<南開封> 동남)에서 가산을 털어 사병 5000명을 모집하였다.

동한(東漢)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 봄, 관동(關東)의 각 군현에서 동탁을 성토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발해태수(渤海太守) 원소(袁紹)를 맹주로 삼았다. 이때 조조는 동탁 토벌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奮武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동탁의 군대가 워낙 막강하였던지라 토벌군은 10만이나 되었지만 아무도 앞에 나서지 못했다. 오직 조조의 군대만 서쪽으로 진격하여 형양(滎陽)에 이르러 동탁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延津>)로 퇴각하였다. 그후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로 결심한 조조는 헌제 초평 2년(191)에 흑산군(黑山軍) 백요부(白繞部)를 진압하고 복양(濮陽: 지금의 하남성 복양 서남)을 점거하였다.

헌제 초평 3년(192년)에 조조는 곤주(袞州: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를 점거하여 청주(靑州: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임치<臨淄> 북쪽)의 황건적을 격퇴하고, 정예병 30만을 선발하여 '청주군(靑州軍)'을 조직하면서 그 세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헌제 초평 4년(193) 가을, 조조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무턱대고 서주(徐州)를 공격하였다가 수만명의 병사를 잃고 그 이듬해 봄에 곤주로 후퇴하였다. 초평 5년(194) 여름에 다시 서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는 여포(呂布) 등이 허점을 노리고 곤주를 점령함으로써 조조는 고전 끝에 간신히 잃어 버린 땅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그는 북방의 통일을 위한 기틀을 하나하나 다져나갔다. 먼저 그는 "기초를 튼튼히 하여 천하를 제압해야 한다"는 순욱(荀彧)의 건의를 받아들여 곤주(袞州)와 예주(豫州)에 근거지를 세웠다.

 

동한 헌제 건안(建安) 원년(196),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 헌제를 가까이 하면서 건덕장군(建德將軍)·진동장군(鎭東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녹상서사(錄尙書事) 등을 역임하면서 조정 대사에 간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헌제를 자기의 세력 범위에 있는 허창(許昌: 지금의 하남)으로 옮긴 다음, 황제의 명의로 각종 조칙을 반포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는 등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허창에서 그는 떠도는 농민들을 소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고 군인들에게도 농사를 짓게 하여 그것을 군둔(軍屯)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일차적으로 백성들에게 자급자족의 길을 열어주고 북방지역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 다음, 나아가서는 이곳을 이후 수년에 걸쳐에 계속된 전쟁의 주요한 보급기지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북방의 통일전쟁을 하나씩 수행해나갔다. 그는 먼저 원소(袁紹)를 물리치고 여포(呂布)를 죽인 다음 유비(劉備)와 장수(張繡)를 몰아내고 황하와 회수(淮水)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점거하였다. 이로써 그는 황하 이북의 원소와 필적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헌제 건안 5년(200), 원소는 10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조조는 만여명의 병력으로 관도(官渡: 지금의 하남성 중모<中牟> 경내)에 진을 치고 출전을 준비했다. 두달 사이에 원소는 조조의 군대가 방어하던 여양(黎陽)을 점령한 후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경내)를 포위하였다. 조조군은 먼저 서쪽으로 향하여 북으로 황하를 건널 태세를 갖추고 원소군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한 다음, 신속하게 동쪽으로 진격하여 원소군의 장수 안량(顔良)을 죽이고 백마의 포위망을 해체시켰다.

그후 백마에 있던 군사들을 전부 남쪽으로 이동시켜 원소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중간에 매복을 설치해두고 원소군의 대장 문축(文丑)을 죽임으로써 원소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원소는 첫전투에서 패한 후에도 계속 남하하여 병력의 우위만 믿고 조조군을 격파하려 하였다. 조조군은 관도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원소군과 대치하였다. 이해 10월, 조조는 원소를 배반하고 귀순한 모사 허유(許攸)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접 정예병 5천을 이끌고 원소군의 진영 북쪽에 있는 식량보급 기지 오소(烏巢)를 기습하여 식량을 전부 태워 버렸다. 이때 원소는 오소가 피습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지 기마병만 파견하여 돕도록 하고 본대는 여전히 조조군을 일거에 대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오소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소군의 장수 장합(張郃)은 조조군에 투항하였다. 이에 조조군은 혼란에 빠진 원소군을 맞이하여 크게 물리쳤다. 원소는 800여명의 기마병과 함께 황하를 건너 달아나고 나머지는 거의 섬멸되었다. 이에 조조는 계속하여 기주(冀州)·청주(靑州)·병주(幷州)를 점령한 후 유주(幽州)로 진격하였다.

헌제 건안 7년(202), 원소가 죽자 그의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원담은 조조와의 싸움에서 피살되고, 원상과 원희(袁熙)는 오환(烏桓: 지금의 기동冀東 요녕遼寧 일대)으로 달아나 재기를 노렸다.

조조는 원소의 잔여세력을 소탕하여 북방의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오환을 정벌할 준비를 하였다. 건안 12년(207) 여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무종(無終: 지금의 천진<天津> 계현<蓟縣>)으로 출동하여 오환을 공격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오환군이 경계를 늦춘 틈을 타서 조조는 그곳의 명사(名士) 전주(田疇)의 안내를 받으며 비밀리에 진격하여 백랑산(白狼山: 지금의 요녕성 카라신 왼쪽의 몽고족 자치현 경내)에서 오환군을 대파하고 유성(柳城)을 점령하였다. 원상과 원희는 수천명의 기마병과 함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도망갔다. 이때 누군가가 내침김에 공손강을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내놓도록 하면 될터이니 병사들을 귀찮게 할 것까지는 없다."

얼마후 과연 공손강은 원씨 형제의 머리를 조조 진영에 보내왔다. 이때에 이르러 조조는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하였다.

건안 13년(208) 조조는 승상에 올라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와 강동(江東)의 손권(孫權)을 물리치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코자 하였다. 9월에 조조군은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성 경내)에 이르렀다. 이때 유표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유종(劉琮)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유표에 의지하여 번성(樊城: 지금의 호북성 경내)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는 황급히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여 장판(長坂: 지금의 호북성 당양<當陽> 경내)에서 유비군을 대파하고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을 점령한 후 대군을 이끌고 강동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에서 내려온 조조의 군대는 수전과 남방의 기후에 익숙지 않았고, 새로 편입된 형주의 병사들은 아직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잇다른 승리로 다소 거만해진 조조는 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는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화공(火攻)에 대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고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당시의 중국은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안 16년(211) 조조는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건안 18년(213)년 위공(魏公)에 책봉되었다. 건안 20년(215) 한중(漢中)의 장노(張魯)를 항복시키고, 그 이듬해(216)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차례 손권을 공격하였지만 모두 무위로 끝났으나, 이때부터 조조의 위나라는 회남(淮南) 지역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건안 24년(219) 한중(漢中)에 이르러 조조는 병력을 형주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손권과 유비의 연맹을 갈라놓고 그들을 격멸하려는 작전에 착수하였다. 손권을 교사하여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를 죽이도록 한 다음 불리했던 형주전선에서 신속히 우위를 되찾았다. 건안 25년(220) 정월, 조조군의 위세가 한창 드높아갈 때 조조는 낙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0년 정월 조조는 병세가 심각해지자 비밀리에 측근들을 불러놓고, 그가 죽은 후 무덤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장할 때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후궁들에게는 진귀한 향을 나누어준 다음 부지런히 신발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자급자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자일(庚子日)에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적벽대전 이후에 형성된 위(魏)·촉(蜀)·오(吳) 삼국정립의 국면은 50여년간 지속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위나라의 황제가 된 후에 조조를 무제(武帝)로 추존하였다.

조조는 용병에 뛰어나고 병법에도 정통하였으며, 인재등용이 엄정하고 상벌이 분명했다. 조조의 저서로는 ≪손자략해(孫子略解)≫ ≪병서접요(兵書接要)≫ 등이 있다. 특히 그는 ≪손자략해(孫子略解)≫에서 ≪손자≫ 13편을 정리하여 최초의 주석을 가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군사이론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그는 또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현재에도 20여수의 시와 40여편의 산문이 전해지고 있다.

 

    ☞  [조조의 일생]    [조조의 무덤은 어디에]   [조조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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