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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이 기록에 근거하여 조조의 진짜
무덤이 지금의 임장현 서쪽의 풍락진(豊樂鎭) 서문표 사당 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풍락진의 서문표 사당은 북제(北齊) 천우(天祐)
5년(서기 554년)에
세워졌지만, 조조는 그보다 300여년 이전인 서기 220년에 죽었는데 어떻게
조조가 서문표 사당 옆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서문표
사당은 황하의 범람을 피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린 곳으로 임장현 일대의
안양(安陽)과 자주(磁州)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서문표 사당 부근인지도 알 수 없다.
둘째,
≪여도비고(輿圖備考)≫와 ≪방여기요(方輿紀要)≫ 등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조는 죽기 전에 무덤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72개의 가묘를
만들도록 지시했고, 그 가묘들은 하북성 임장현(臨漳縣) 삼대촌(三台村)
서쪽 8리의 강무성(講武城)에서 자주(磁州)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니,
마치 산처럼 늘어서 있는 그 무덤들 중에 진짜 무덤이 하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명대 유응부(兪應符)의 <72의총(七十二疑塚)>과 청대
진대개(陳大玠)의 <의총기(疑塚紀)>에서는
모두 이 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청대 말기에서 민국 초기에 이
가묘들은 대부분 도굴되었는데, 이후 그 무덤들의 주인은 대부분 북위(北魏)·북제(北齊)
시대의 왕후장상들로 밝혀졌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조조가 잡아놓은
터에 후세 사람들이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조조의 가묘는 북조시대 왕후장상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변하였던 것이다.
셋째,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지임치후식구제선왕조(止臨菑侯植求祭先王詔)>에서,
"강가에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려고, 성의 위 아래를 둘러보니,
슬픔이 뼈를 스며드는구나"라고 하였다. 청대 심송(沈松)의 ≪전건필록(全健筆錄)≫에서는
≪견호속집(堅瓠續集)≫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치(順治)
초기에 장하(漳河)의 강물이 말랐다. 그때 어부들이 강속에서 큰 석판(石板)을
보았는데 옆에 그것을 붙인 틈이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다가가서 보니,
거기에는 석실과 돌침대가 있고 돌침대 위에는 제왕의 복장을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그 가운데는 비석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누워있는 사람이
조조라고 쓰여져 있었다. 어부는 그 시신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실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1983년 그곳의 농민이 장하대교
아래에서 은화와 각종 보물 등을 캐냄으로써 이 설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장하대교 아래에서 출토된 문물은
명대 황궁의 함대가 이곳에서 침몰되었기 때문이며 조조의 무덤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넷째,
또 어떤 사람들은 세 번째 설에
근거하여 조조의 무덤이 지상에 있지 않고 장하의 강속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옛날의 장하는 역사적으로
이미 물길이 바뀌었으며, 동작대(銅雀台)와 빙정대(氷井台)는 장하의
물길이 바뀔 때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위 문제 조비는 조조의 무덤이
장하에 잠겨 버려서 제사지낼 장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슬픔이
뼈를 스며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최근에 학자들은 ≪위무기(魏武紀)≫ ≪술이기(述異紀)≫ ≪창덕부지(彰德府志)≫
≪통전(通典)≫ ≪태평환우기(太平寰宇紀)≫
등의 관련 자료와 1975년 임장현 습문촌(習文村)에서 발견된 동한 말기의
무덤을 근거로 종합적인 분석을 한 결과, 조조의 무덤이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 영지촌(靈芝村)과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 습문촌 일대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지금의 영지촌과 습문촌
일대가 인수리(仁壽里) 서문표 사당에서 6~7리 떨어져 있고 주위가 평원이어서
조조가 유언에서 지시한 "서원(西原)"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영지촌과 습문촌 일대가 당시 업(邺)의
중심지여서 조조가 업의 변두리 보다는 이곳을 자신의 묘지로 택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습문촌 북쪽 4리와 영지촌
서북쪽 6리 지점에 동태평촌(東太平村)이 있는데, 이곳의 원래 지명
치촌(馳村)이 동치촌(銅馳村)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사서에서는 조조의
무덤이 동치(銅馳)에 있다고 하였는데, 치촌은 그로 인해 특별히 얻어진
지명일 것이라는 게다.
이상의
여러 가지 추정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의 무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자료의 부족으로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현재로서는 조조가 죽은 해 2월에 조비가 유언에 따라
유체를 업(邺: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 일대) 땅으로 운구하여 안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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