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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시황 통치 말기에 가혹한 정치를 더이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전국 도처에서 반기를 일으켰으며, 육국의 잔존 귀족세력들도
그러한 틈을 타서 반진(反秦)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BC 218년(진시황 29년)에 진시황은 동쪽으로 순찰을 나갔다가 박랑사(博浪沙:
지금의 하남성 중모<中牟> 서북)에서 자객의 저격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시황이
사구(沙丘)에서 병사한 후 진이세(秦二世) 호해(好亥)가 즉위하였으나,
부패무능한 진이세의 학정과 이때 실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의 전횡으로 백성들은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형을 받은 자가 도로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죽은 자들이
날마다 저자거리에 쌓여갔다. 진시황의 옛신하들과 진왕실의 친족들도
조고의 모함으로 대부분 살해되어 통치권 내부에도 심각한 불안이 조성되었다.
진이세
원년(BC 209) 7월, 진승과 오광은 빈민 900명과 함께 징집되어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 밀운현<密雲縣> 서남)을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원래 빈민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계속된 징집으로 부족해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징집을 한 결과였다.
진승은 자가 섭(涉), 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상수<商水> 서남)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오광은 자가 숙(叔), 양하(陽夏: 지금의 하남성 태강<太康>)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진승은
비록 집이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품은 뜻이 웅대하고
정의감이 강했다. 한번은 그가 친구와 함께 논을 갈다가,
"언젠가 부귀하게 되면 자네를 절대 잊지 않겠네."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진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주제에 어떻게 부귀해 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진승은 길게 탄식하면서,
"그만두게, 참새가 어찌 큰 새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웅대한 뜻을 품은 진승이 오광과 함께 빈민들의 대장으로 징집되어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양으로 가는 도중에 대택향(大澤鄕: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동남) 부근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변고를 만났다.
연일 계속해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계속 지체하다 보니 예정된 기간내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진나라
법에 의하면 징집에 응하여 예정된 기간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들 빈민 행열 앞에 놓인 것은 죽음 뿐이었다.
졸지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 진승과 오광 등은 불안에 휩싸이면서
탈출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승은 오광 등과 상의한 끝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빈민들을 향해서 외쳤다.
"우리는 어차피 죽을 목숨들이니 죽을 때 죽더라도
이름이나 떨쳐야 되지 않겠소! 왕후장상에 씨가 어디 따로 있겠소!"
반란이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 대담하게도 중국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먼저 진시황의 장자 부소(扶蘇)와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의 이름을 내세우고 병사들을 선동하였다. 부소는 이미
진이세 호해와 조고의 모함으로 죽었고 항연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 피살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진승과 오광은 그들의 사회적 명성을 빌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900명의 병졸들 중에서 두 사람을 뽑아내어 부소와
항연의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들은
또 봉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귀신의 힘을 빌었다. 사전에
미리 비단에 주사(朱砂)로 "진승왕(陳勝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물고기의 배 안에 집어넣어 두었다. 그 물고기를 산 병졸들은 물고기의
배에서 나온 그 글자를 보고 크게 술렁거렸다. 그날 밤 오광은 몰래
그들의 주둔지 부근의 숲속으로 가서 불을 지르고 여우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초나라가 일어나 진승이 왕이 된다.(大楚興, 陳勝王)"고
외쳤다. 이러한 미신적인 방식은 병졸들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켜 마침내
봉기를 일으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하였다.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오광을 도위(都尉)로 삼았다. 그들은 먼저 대택향을
점령한 다음 대택향 소재의 기현(蕲縣: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남쪽)을 공격하였다. 기현을 점령한 후에 그들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했다. 즉 하나는 기현 동쪽으로 나아가고, 다른
하나는 진승의 통솔하에 기현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무기라고는 몽둥이와
농기구 뿐이었는데도 그들은 파죽지세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불과 한달만에 다섯 개의 현을 점령하였다. 반란군이 진현(陳縣: 지금의 하남성 회양<淮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이미 수만명의 보병과 천여명의 기병, 6~7백대의 전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진승은 옛날
초나라의 도성이자 반진(反秦) 정서가 가장 풍부한 진(陳)을 점령하여
그곳을 항진(抗秦)의 거점으로 삼은 다음,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였다. '장초'란
초나라를 장대하게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진승이 정권을 세운 후 "무도한
자들을 치고 포악한 진나라를 없애자"라는 구호를 내걸자 장강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그들의 봉기에 호응하였다.
이에
진승은 진나라에 대한 전면전을 준비하고 오광을 가왕(假王:
왕권을 대행한다는 뜻)에 임명한 후, 그에게 주력부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으로 통하는 길목인 영양(荥陽: 지금의 하남성 영양 동북)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병력을 사방으로 보내어 무신(武臣)과
장이(張耳)·진여(陳余)는 북으로 옛 조(趙)나라 땅을 공격하게 하고, 등종(鄧宗)은 남으로
구강(九江: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을, 주시(周市)는 옛 위(魏)나라 땅을 탈취하게
하였다.
장초정권의
수립으로 전국적인 반진(反秦) 항쟁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이 분분히 일어나 진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진승에 호응하였다.
특히 옛 초나라 지역에서는 수천명이 반란에 가담하여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여산(驪山)의 죄수 영포(英布)와 번양령(番陽令)
오예(吳芮)는 수천명의 반란군을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동양(東陽)의
소년도 현령을 죽이고 진영(陳婴)을 장으로 추대하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2만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진가(秦嘉), 주계석(朱鷄石) 등은 병사를 일으켜
담성(郯城)을 포위하였다.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었던 유방(劉邦:
후세의 한 고조)은 패현(沛縣)의 소하(蕭何)·조참(曹參) 등과 함께
패령(沛令)을 죽이고 2~3천명의 병력을 조직하였다. 이와 동시에 육국
귀족의 잔존 세력들도 분분히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제(齊)나라의 귀족 후예 전담(田儋)은 적령(狄令)을 죽이고 제왕(齊王)에
올랐으며, 초나라의 귀족 후예 항량(項梁)과 항우(項羽)도 회계(會稽)
군수 은통(殷通)을 죽였다. 항량은 회계 군수에 올라 항우를 부장으로
삼고 8천여명의 병사를 소집하였다.
오광이
반란군을 거느리고 영양을 공격하고 있을 때, 진승은 주문(周文)을 보내어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주문의 부대는 함양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지속적으로
세력이 확대되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는 천여대의 전차와 수십만의
병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들이 함양에서 백리 가량 떨어진 희(戱:
지금의 섬서성 임동<臨潼> 동북)에 도달했을 때, 진이세는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여산묘(驪山墓:
진시황릉)
공사 중이던 죄수와 노예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던데다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패전을 거듭하여 함곡관으로 퇴각하였다가, 주문은 뒤에 자살하고 말았다.
반진(反秦)
항쟁이 전개되면서 반란군 내부에서는 지휘부가 분열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진승이
오만해져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동료들을 죽임으로써 대중들과의
관계가 날로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각지에 파견한 장수들은 진승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이권을
쟁탈하다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무신(武臣)은
한단에서 조왕(趙王)에 올라 진여(陳余)를 대장군, 장이(張耳)를 승상으로 삼았다.
크게 노한 진승은 그에게 관내로 들어가 주문을 지원할 것을 명했지만, 그는 명령을
거역하고 한광(韓廣)으로 하여금 연(燕)나라 땅을 점령하게 하였다.
한광은 또 연나라 땅에서 그곳의 옛 귀족들과 담합하여 연왕(燕王)에
올랐으며, 주시(周市)는 위(魏)나라 땅으로 가서 위나라의 옛 귀족 영릉군(寧陵君)을
위왕(魏王)으로 옹립했다.
영양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 장수 전장(田臧)은
오광과의 의견 불일치로 진승의 명을 빌어 오광을 죽여 버렸으며,
그 결과 영양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장한(章邯)은
반란군의 영양에 대한 포위망이 풀어지자 전력을 다해 진현(陳縣)으로
달려갔다. 진승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맞이하여 싸웠지만, 이미
고립에 빠진 상황에서 세력이 약화된데다 병력의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아
패하고 말았다. 결국 진승은 진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진현을 탈출하기로
하고, 진이세 2년 12월, 여음(汝陰: 지금의 안휘성 부양<阜陽>), 하성부(下城父: 지금의 안휘성 몽성<蒙城>
서북)로 퇴각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승의 부대가 여음에서 하성부로 돌아오는 길에 진승은
그의 마부인 배신자 장고(庄賈)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진승의 부장
여신(呂臣)은 병사들을 이끌고 진현을 수복한 다음 장고를 처형하였다.
진승과
오광이 잇달아 희생되자 농민반란군은 잠시 기가 꺾였지만, 각지의 반란군은
여전히 항쟁을 계속 전개하여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
한나라를 탄생시켰다. 진승과 오광은 직접 진왕조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봉건왕조의 폭정에 과감하게 항거함으로써,
중국역사상 최초의 농민투쟁을 이끈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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