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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죄수가 '포락'의 형을 받고 팔딱팔딱 뛰면서 재로 변할
때마다 그녀는 성에 굶주린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주왕의 품에 달라붙어
몸부림쳤다. 그녀는 일종의 사디슴(sadism: 이성을 학대함으로써 성적
만족과 쾌감을 얻는 변태증)적 변태 성욕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본 후에 섹스를 하면 그녀의 천부적인 성기능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주왕에게 더욱 강렬한 만족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주왕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이 형벌로써 자주
달기의 성욕을 자극하였다. 짧은 1~2년 사이에 이 형벌로 죽어간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 '포락'의 형을 즐기는 것도 점차 지겨워지자 달기는 다시
고심 끝에 '돈분(躉盆)'이란
형을 고안해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녹대 부근에 넓고 깊은 구덩이를
하나 파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사와 전갈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죄수들을 발가벗겨서 안으로 밀어넣게 하였다. 달기는 주왕과 함께
녹대 위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그 구덩이 안에서 독사와 전갈에 잡아먹히면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그것을 즐겼다. 주왕은 잔치상 바로 옆에
침실을 마련해두었다가 일단 달기의 성욕이 발동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서 무한한 환락에 빠져들곤 하였다.
얼마후
달기는 다시 '돈분' 좌우로 연못을 하나 파달라고 한 다음,
연못을 피하여 왼쪽에는 술지게미를 쌓은 작은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심게 했다. 그 나무 위에 고기덩어리를 매달아두고 그것을 '육림(肉林)'이라
하였으며, 오른쪽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워놓고 그것을 '주해(酒海)'라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궁녀와 환관들을 불러모아서 나체로 씨름을 하게
한 다음, 승자는 '주해육림(酒海肉林)'에 들어가서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고, 패자는 주왕의 존엄함을 욕되게 했다고 하여 '돈분'에
집어넣었다.
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이후의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三公)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달기에 필적할 정도로 그 용모가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강제로 데려와서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놓고 차례로 훑어보면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그녀를 비에 책봉했으나 정숙한 구후의 딸은 그처럼 황음무도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주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잔인한 달기는 기뻐한 나머지 또다시
독랄한 형벌을 생각해냈다. 미꾸라지를 여러 마리 잡아오게 한 다음,
구후의 딸을 벌거벗겨서 사지를 큰 대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놓고 미꾸라지를
그녀의 음부에 집어넣게 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따뜻한 구멍을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음부속으로 다투어 파고들었다. 구후의 딸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주왕은 분노가 가시지 않아 다시 구후를 잡아오게
하여 살을 갈기갈기 토막내어 버렸다.
악후도
몇 번이나 간언을 하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서백 희창(姬昌)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세 번 탄식한 다 기산(歧山)에서 비밀리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폭군 주왕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달기의 악랄한 위세는 날로 심해져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 가벼이 여겼다.
주왕은 오로지 그녀의 성욕을 자극시키느라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산사람을 화살 과녁으로 삼거나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었다.
달기는 심지어 임산부의 배에 들어있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주왕과 내기를 하고, 임산부를 잡아와서
직접 배를 갈라 확인해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잔인한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3대에
걸친 공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에게 간언을 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자기가 심장병이 들었는데 성현의 심장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당장 충직한 신하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기원전
1057년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후의 주나라 무왕)과 군사(軍師) 강자아(姜子牙: 강태공)가 대군을
거느리고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를 공격하였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서 그 아래에 붙혀둔 불길 속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달기는 강자아의 병사들에게
붙잡혔을 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로, "나에게는
공은 있으되 죄는 없다. 만약 내가 주왕을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이
어찌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느냐?"라고 외쳤다.
강자아는
달기를 봉신방(封神榜)으로 끌고가서 참수를 명했다. 그런데 망나니가
칼을 뽑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달기는 돌연히 머리를 돌려 요염한
웃음을 날리면서 그를 홀렸다. 망나니는 갑자기 넋이 빠져 달기를 멍청히
바라보다 그만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망나니들로 바꾸어서
계속 집형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강자아는 달기의
사람 홀리는 술책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고, 부하의 화살을
꺼내어 직접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연속해서
세 발을 쏘았다. 이로써 달기는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파란만장했던 상나라의 역사도 종말을 고하고 새로 일어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달기와
주왕에 관한 위의 이야기는 대부분 ≪봉신방≫을 근거로 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봉신방≫은 많은 야사들을 기록한 일종의 신화소설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백퍼센트 진실로 간주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견된 은허(殷墟: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에서는 은(殷)
상(商) 시기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 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된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거북 껍질에 기록하여 점을 치는 형식을 통해서 결정하였는데,
주왕이 일방적으로 달기의 말에 따라 모든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또 달기가 주왕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중국역사를 살펴볼 때(물론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의 역사도 마찬가지 임), 그녀의 친정 세력이 충분히
권력의 중심에 들어섰을 법도 한데, 어떤 역사서에도 그녀의 일족인
유소씨(有蘇氏)의 권력 장악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도
우리에게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달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뒤에 권력을 잡은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직전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한 예를 도처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설도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주왕의 포악성과 달기의 음란함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부분이 특히 왜곡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의 추측일 뿐 아직까지
반론을 제기할 만한 확증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달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주왕이 '녹대'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한 후에 달기는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나라 군대가 조가에 진입한
이후에 더 이상 달기를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의 방증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악녀와 요녀의 화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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