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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말에 사천성
중경(重慶)에 있는 프랑스 유학 예비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인 16세 때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3전 3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시작하였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유럽 지부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에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기관지 편집 업무에 참여하였다. 1924년 주은래(周恩來),
이부춘(李富春) 등이 국내혁명으로 중국에 돌아가자, 이 해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등소평은 유럽 총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6월 '5.30 사건'으로
핍박받던 상해 노동자들을 성원하다가 프랑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소련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1926년
3월 풍옥상(馮玉祥)을 따라 귀국하여 9월에 중산군사학교(中山軍事學校)
정치교관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중국 서북부의 풍옥산
장군 휘하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27년
장개석(蔣介石)은 상해와 남경을 점령한 후 본격적인 공산당원
색출 작업에 나섰다. 7월 풍옥상도 자신의 부대에서 공산당원을
숙청하기 시작하여 등소평은 50여명의 공산당원들과 함께 거기서 축출당했다.
등소평은 즉시 한구(漢口)로 남하하여 중국공산당 중앙 기관에 들어가
이름을 등희한에서 등소평(鄧小平)으로 바꾸고 비밀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공 중앙 기관에 들어간 이후 등소평의 당내 지위는 급속히 상승하여
중공 중앙 비서장(1929년 여름까지)을 역임하였다. 이때 그는 불과
23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1929년
봄과 1930년 초에 장운일(張雲逸) 등과 함께 중국 남부의 광서(廣西)에서
백색봉기(白色起義)와 용주봉기(龍州起義)를 주도하고, 중국 공농홍군
제7군, 제8군과 좌강(左江), 우강(右江)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다.
1931년
등소평은 부대를
이끌고 홍군 주력부대와 합세하기 위하여 강서(江西)로 가던 도중에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받고 군단장 장운일과 연락이 끊겼다. 등소평은
즉시 일부의 부대를 이끌고 강서 수의(祟義)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였다. 광서에
있을 때 등소평은 여러 차례 상해로 돌아가서 중앙에 업무 보고를
하였으며, 중앙의 지도자를 따라 중앙소비에트구에 들어가 '혁명수도'
서금(瑞金)의 현장(縣長)과 현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32년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 서부에 위치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서 군사위원회
총정치부 비서장, 홍군(紅軍) 신문 ≪홍성(紅星)≫의 편집장, 중국공산당
강서지방조직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반라명(反羅明)'
노선을 일으켜 모택동(毛澤東)의
주장을 옹호하다가 당내의 좌경 세력에 의해 모든 직위에서 파면당하였다.
이것이 등소평의 정치무대에서
첫 번째 좌절이다.
1934년
10월 장정(長征)에 참가한 등소평은 그 해 말에 복위되어 중국공산당 총정치부 비서장
겸 ≪홍성보(紅星報)≫의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1월에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개최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였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第八路軍)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그는 팔로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그 후 129사단 정치위원을
역임하면서, 사단장 유백승(劉伯承)과 함께 진기예(晋冀豫) 등의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그 지역의 항일전쟁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으며, 해방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진기노예(晋冀魯豫) 야전군(후에는 중원야전군,
제2야전군으로 개명되엇음)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47년에 그는 유백승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너 남쪽으로 대별산(大別山)
지구로 진격, 국민당 군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1949년에는
해방전쟁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회해(淮海)전투와 도강(渡江)전투에서 총전선
지휘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유백성, 진의(陳毅)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을 통솔하여 국민당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한 다음, 화동(華東),
중남(中南), 서남(西南)의 각 성으로 진격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위원, 중국공산당 중앙 서남국(西南局) 제1서기,
서남 군사정치위원회 부주석, 서남 군사지구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중앙인민정부 정무원(1954년 국무원으로 개편되었음) 부총리를 역임하고,
1954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1955년
4월 중국공산당 7기 5중전회에서 임표(林彪)와
함께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의 규정 수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8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되었다.
1957년
모택동이 일으킨 '반우파' 운동 중에 판공실 주임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모택동의 '대약진', '대련강철(大鍊鋼鐵)',
'인민공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59년
중국대륙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등소평은 사상을 반성하면서 팽덕회(彭德懷)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숙청된 이후 등소평도 점점 모택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956~1963년 사이에는 여러 차례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졌으며, 1965년
1월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타도 대상에 올랐던 유소기(劉少奇)에
이어 그도 공개적인 비판을 받고
중남해(中南海)에 연금되었다.
이것이 그의 정치무대에서
두 번째 좌절이다.
1966년
8월 '홍위병(紅衛兵)' 운동이 일어난 이후 혁명의 공포가
중국 전역을 뒤덮었다. 농촌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공장에서 학교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감옥이요 도살장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등소평은
주은래의 부탁에 따라 중남해에서 한 걸음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7~8월 사이에 등소평은 중남해에서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으며,
9월에는 그의 다섯 자녀들이 모두 중남해에서 쫓겨났다.
1968년
10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8기 12중전회에서 유소기는 당에서 영원히
축출되었으며, 등소평은 '엄중 경고'를 받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에서 파면되었다. 1969~1973년 사이에는 강서성에
있는 트랙트 공장으로 추방되어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임표사건'
후에 주은래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섭검영(葉劍英)이 중앙군사위원회의
모든 일상적인 업무를 주관하였다. '임표사건'은 등소평의
두 번째 재기의 기회가 되었다. 1973년
3월 그는 부총리직에 복위되어, 8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12월에는 다시 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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