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9년
제6진(第六鎭)을 맡았다가 이듬해 강북제독(江北提督)으로 발령받아 강소성
청강(淸江)에 주둔하였다. 1911년
무창봉기(武昌起義)가 발발하자 칙명을 받들어 호북(湖北)으로 달려가서
혁명을 진압하였다. 남북회담 기간인 1912년 초에 원세개의 의향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 두 번의 전보를 보내 황제 퇴위를 독촉하였다. 3월에
원세개는 손문(孫文)으로부터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을 이어받았고, 단기서는
육군총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단기서는 한동안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다가 군대를 동원하여 2차혁명을
진압하였다. 그 후에 다시 호북도독(湖北都督) 서리 겸 하남도독(河南都督)을
역임하면서, 하남성, 호북성, 안휘성 등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랑봉기(白朗起義)를
진압하였다.
1915년
5월, 그는 원세개의 군주제 환원에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홍헌군주제(洪憲: 원세개의
연호)를 취소하고 단기서를 재등용하여 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4월에
단기서는 서세창(徐世昌)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 겸 육군총장을
역임하였다. 6월에 원세개가 사망하자 여원홍(黎元洪)이 총통직을 계승하였으며,
단기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임명되어 북경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북양군벌은
점차 직계군벌(直系軍閥)과 환계군벌(晥系軍閥)의 두 파로 분열되었으며,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이 되었다. 1917년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여원홍은 단기서의 총리직을 해임하였으며, 이에
단기서는 각 성의 군사장관들을 책동하여 여원홍을 타도하였다.
장훈(張勛)이
여원홍과 단기서의 충돌을 화해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하여 청나라 마지막황제 부의(溥儀)의 확제 복위를 시도했다. 장훈의
황제 복위 음모가 무산되고 여원홍은 총통직에서 물러났다. 단기서는
부총통 풍국장을 총통 서리로 맞이하고 자신은 다시 총리를 맡았다.
그러나 <임시약법(臨時約法)>과 국회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같은
해 9월 손문이 광주에서 임시약법을 수호하는 군사정부를 세웠다. 단기서는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풍국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의 저지를 받았다. 11월에 단기서는 강요에 의해 국무총리와
육군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단기서의 사주를 받은 각 성의 군사장관들이
풍국장에게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단기서는 다시 복위되어 남방정벌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북양군이
호남성 형양(衡陽)을 점령한 후에 직계군벌 장성 오패부(吳佩孚)가 1918년
8월 휴전 통신문을 연속적으로 보내고, 단기서 정부의 친일매국 정책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되었다.
9월에 풍국장이 총통 서리직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안복국회(安福國會)에서는
서세창을 총통으로 선출하였다. 단기서도 총리직에서 물러나 참전 감독만을
전담하였다.
1920년
7월,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환계군벌이
패배하자 단기서는 직위에서 물러나 천진으로 이주했다. 그후 단기서는
봉계군벌(奉系軍閥) 장작림(張作霖), 남방의 손문과 연합하여 직계군벌의
통치를 반대하였다.
1924년
10월에 이르러 봉계군벌은 풍옥상(馮玉祥)의 부대와 연합하여 직계군벌을
물리쳤다. 단기서는 '중화민국 임시집정(中華民國臨時執政)'에
추대되었으며, 그는 '선후회의(善後會議)'를 소집하여 손문이
주장하는 국민회의를 배척하였다.
1926년
3월 18일, 단기서는 돌연 집정부 호위대를 교사하여 북경의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제국주의 청원 대열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 '3.
18 학살사건'에서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되었다.
4월에
단기서는 다시 봉계, 직계군벌과 연합하여 풍옥상의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동교민항사관구(東交民巷使管區)로
도피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패부, 장작림의 신임을 잃게 되자, 결국
천진 조계지로 물러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자호를 정도거사(正道居士)라
하였다.
1933년
2월 단기서는 상해로 이주하였다가, 1936년 11월 2일 상해에서 병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