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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부차가 병에 걸렸다. 범려는 그 병이 평범한 질병으로 조금 지나면 바로
낫는다는 것을 알고는 구천과 상의하여 부차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계책을
하나 준비하였다. 구천은 부차를 만나 그의 병세를 살폈다. 구천은 손가락으로
부차의 대변을 찍어 입에 넣고 맛을 본 다음 큰 소리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대왕의 병은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차가 의아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다. 구천은 범려가 부탁한 그대로
말하였다. "신은 일찍이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데, 환자의 대변만 맛보아도 그 병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대왕의 대변은 맛이 마치 곡식의 맛처럼 시큼하면서도
씁니다. 이로써 대왕의 병세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구천과 범려를 석실에서 나와
근처의 민가에 살면서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차의
병이 다 나았다. 범려가 예상했던 대로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낼
결정을 하였다. 오자서가 극구 반대를 하였지만 부차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BC
490년 구천은 오나라에서 3년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월나라로 돌아갔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고 복수를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구천은 도읍을 제기(諸暨)에서
회계로 옮기기로 하고 범려에게 새로운 도읍의 건설을 명했다. 범려는
천문과 지형을 살핀 다음 신성을 축조하였다. 밖에 성벽과 성문을 만들면서
서북쪽에 특별히 성문을 하나 더 만들고 오나라에는 조공을 바칠 길을
닦는다고 소문을 내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오나라를 신속히 공격하기 위한 군사도로였던 것이다.
구천이
범려에게 월나라를 발전시킬 방법을 묻자 범려는 예리한 주장을 펼쳤다.
"하늘의
운행과 사람의 일은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에 방침과 정책을 세워 미리
대처해야 합니다. 만물은 땅에서 소생하고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만물과 하나가 되어 기르고 있기 때문에 금수와 농작물 등은
대지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만물이라도 땅은 차별 없이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그러한 대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생장에는 각기 정해진 때가 있는지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생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일에 대한 변화도 마찬가지여서
최후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처세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켜야 합니다."
범려는
계속하여 내정 방면에서 월나라를 부흥시킬 정책들을 건의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보호하면서 생산력을 강화시켜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천에게 직접 들에 나가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짓도록 하고, 구천의 부인에게도 직접 베를 짜면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을 권하였다. 그결과 월나라는 점점 국민생활이
안정되고 국력도 부강해졌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범려는 약소국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강대국에게는 표면적으로만
유순한 입장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나라에 대해서도 그들의
힘이 쇠약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멸망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구천은 범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며 군대를 양성하는 일에 조금도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범려는
또 직접 민간에서 미녀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찾아내어
그녀들을 금은보화와 함께 오나라 왕에게 헌상하는 한편, 부차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주색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 그리고
초(楚)·제(齊)·진(晋)과 연합하여 오나라를 최대한 고립시켰다.
BC
485년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온지 5년째 되던 해에 월나라는 국고가 충실해지고
전국토가 개간되어 백성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고 "회계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좀더 기다릴 것을 간청하였다.
1년
후에 오나라 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월왕 구천은
여기에서 오나라가 많은 국력을 소모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직접 많은
예물을 가지고 오나라를 방문하였다. 오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온갖 허세를
부리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오직 오자서만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매우 근심스러워하면서 부차에게 제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월나라를 칠
것을 건의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건의를 뿌리치고 마침내 제나라 공격을
감행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제나라 공격에서
승리를 거둔 부차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개선하였다. 그는 오자서를 보고
크게 나무랐지만 오자서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3년내에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크게 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보검을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오자서가 죽은 후 부차는 태재 백비를
더욱 총애하여 오나라 조정은 더욱 부패해졌다.
마침내 17년간
와신상담을 통한 각고의 노력 끝에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과 치욕을 갚고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자결토록 했다.
BC
473년 구천은 여세를 몰고 북상하여 산동의 서주(徐州)에서 제후를 회맹케
하여 장강(長江), 회하(淮河) 유역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대하고 자칭 "패왕(覇王)"으로
일컫기에 이르렀으나, 그 공적은 명신 범려의 보좌에 힘입은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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