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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양수청을 좌보정군사(左輔正軍師)에 임명하여
중군주장(中軍主將)을 맡게 하고, 소조귀를 우필우정군사(右弼又正軍師)에
임명하여 전군주장(前軍主將), 풍운산을 전도부군사(前導副軍師)에 임명하여
후군주장(後軍主將), 위창휘(韋昌輝)를 후호우부군사(後護又副軍師)에
임명하여 우군주장(右軍主將), 석달개(石達開)를 좌군주장(左軍主將)을
맡게 했다.
5월
이성원이 죽자 청나라 정부에서는 다시 대학사(大學士) 새상아(賽尙阿)를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3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태평군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태평군은 동향(東鄕)에서 철수하여 상주(象州)로 진격하였다가,
다시 상주에서 계평(桂平)을 공격하여 정부군을 격파한 후 평남(平南)으로
동진하였다. 9월 태평군은 평남 관촌(官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태평군은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단번에 영안주성(永安州城: 광서<廣西> 몽산<蒙山>)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홍수전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 처음으로 점령한 도시였다.
홍수전은
영안에서 천력(天曆: 태평천국의 역법)을 공포하고 각종 제도를 제정하였다.
12월17일 홍수전은 여러 왕들을 봉하는 조령을 반포하고,
양수청을 동왕(東王), 소조귀를 서왕(西王), 풍순산을 남왕(南王), 위창휘를
북왕(北王),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일강(秦日綱)을
천관승상(天官丞相), 호이황(胡以晃)을 춘관무상(春官巫相)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도 각각 관직을 내렸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중앙 조직의 추형을 갖추게 되었다. 이듬해
봄, 그는 <태평조규(太平條規)>를 반포하여 태평군(太平軍)의
군율로 삼았다.
1852년
4월 4일 태평군은 영안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정부군을 물리친 후, 6월 3일 전주(全州)를
점령하였다. 이때 남왕 풍운산의 전사는 태평군의 전력과 사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럼에도 태평군은 호남(湖南)으로 계속 진격하여 6월
12일 도주(道州)를 점령하였다.
1853년 3월, 홍수전과
양수청 등이 이끈 태평군은 남경(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청나라
조정과 대치하는 태평천국 정권을 정식으로 수립한 홍수전은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천경(天京)이라 개칭하였다. 이때
홍수전은 토지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를
공포하였다. <천조전묘제도>란 태평천국의 새로운 왕조로서의
이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따라서 토지의 사유를 금하고,
토지는 국가소유로서 경작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며, 수확의 잉여분은
국고에 납입시키며 개인적인 축재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1853년
3월 말 새로 임명된 흠차대신 향영(向榮)이 남경 교외에 진을 치고 태평군에
대한 반격 준비를 하였으며, 4월에는 다른 흠차대신 기선(琦善)도 양주(揚州)
부근에서 태평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나라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태평군은 북벌과 서정(西征)을 감행하였다.
천경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홍수전과 양수청 등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먼저
천진(天津)을 점령한 다음 지원군과 합류하여 북경을 공격하기로 협의하였다.
1853년 5월 임봉상(林鳳祥), 이개방(李開芳), 길문원(吉文元) 등에게
2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게 하였다. 그들은 양주에서
안휘를 거쳐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10월 말에 천진 서남쪽의 양류청(楊柳靑)에
도달했다. 깜짝 놀란 청나라 조정에서는 북경의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함풍제(咸豊帝)도 열하(熱河)로 피난갈 준비를 하였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황급히 정예병력을 소집하여 북벌군을 방어토록 하였다. 천진 지역의
관료, 지주, 부호들도 스스로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북벌군의 공격에
대항했다. 11월 북벌군은 정해(靜海) 일대로 퇴각하였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대부분 남방인들로 구성된 태평군은 북방의 혹한을 견디기 어려웠고,
게다가 식량과 무기마저 떨어져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정부군을
맞이하여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1854년 2월 북벌군은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홍수전과
양수청은 임풍상 등의 북벌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즉시 증립창(曾立昌),
진사보(陳仕保), 허종양(許宗揚)에게 7천 병력을 이끌고 북벌군을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북벌 원정군도 도중에 임청(臨淸)에서 청나라 정부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였다. 천경에서는 다시 진일강(秦日綱)을 파견하여
북벌군을 지원하게 하였으나 서성(舒城) 양가점(楊家店)에서 정부군에게
패하였다.
북벌군은
2년 동안 분전을 거듭하면서 수십 개의 주현(州縣)을 점령하여 장강(長江)
유역에서는 그 위세를 크게 떨쳤지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막강한 경기(京畿)
지역에서는 후방의 원활한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지휘부의 계속된 실책으로
정부군의 완강한 대항을 격파하지 못하였다.
태평군은
북벌을 전개한 동시에 서쪽으로도 진격하였다. 서정의 전략 목적은 3대
군사 요충지인 안경(安慶), 구강(九江), 무창(武昌)을 탈취하여 장강
중류를 손에 넣음으로써 천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853년
5월, 천경에서는 호이황(胡以晃), 뇌한영(賴漢英), 증천양(曾天養) 등을
파견하여 천여척의 배를 거느리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휘와 강서를
공격하게 하였다. 6월 안경을 점령한 후 계속 서진하여 남창(南昌)을
공격하고, 9월에 구강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안휘의 대부분을 점령한
태평군은 승세를 타고 호북으로 진격하여 한구(漢口), 한양(漢陽), 무창을
점령하였다.
1854년
4월~5월 사이에 태평군은 청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진압에 나선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의 군대와 정항(靖港)과 상담(湘潭)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그후 태평군은 증국번의 군대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856년 3월에 강서 지역의 50여개 주현(州縣)을 장악하였다. 3년에 걸친
서정 끝에 태평군은 3대 군사 요충지인 무창, 구강, 안경을 확보함으로써
태평천국 정권을 공고히 하였다. 서정군이 강서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태평천국의 지도부는 천경을 포위하고 있던 정부군을 물리쳤다.
이때에 태평천국은 천경에 도읍을 정한지 3년째 되면서 군사력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태평천국의 지도부는 자만에 빠져 초기의 혁명정신을
망각하고 권세와 향략 추구에 열중하였다. 특히 홍수전과 양수청은 천경에서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려한 천왕부(天王府)와 동왕부(東王府)를
축조하였다. 천왕 홍수전은 민간에서 많은 여자를 선발하여 자신의 비빈으로
삼았으며, 동왕 양수청은 출궁할 때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의장대열이
수천명에 달하였다.
홍수전은
천경에 있는 동안 궁궐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군정대권은 모두 양수청이 장악하고 있었다. 양수청은 혁명 초기에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였지만 천경에 도읍을 정한 후에는 자만과 권위의식에
젖어 위로는 홍수전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다른 장수들에게 강압을 행사하였다.
1856년
8월 홍수전은 양수청의 강요에 못이겨 그를 '만세(萬歲)'에
봉하였다. 이로써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홍수전은
어쩔 수 없이 양수청의 요구를 수락하기는 하였지만, 즉시 강서(江西)에
있던 위창휘와 단양(丹陽)에 있던 진일강에게 밀서를 내려 천경으로
돌아와 양수청을 대응하게 하였다. 홍수전의 명령서를 받은 위창휘는
심복 3000명을 이끌고 급히 천경으로 달려갔다. 9월 1일 밤 위창휘는
동왕부를 기습하여 양수청과 그 일족들을 포위한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명을 몰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석달개는 무창에서 천경으로 돌아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인 위창휘를 힐책했다. 위창휘는 석달개의 충고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석달개를 죽이려고 하였다. 깜짝 놀란 석달개는 밤에
천경을 탈출하였으나 그의 처자식과 노모는 모두 위창휘에게 피살되었다.
이러한 위창휘의 무분별한 도살 행위에 극도로 분노한 태평군 병사들은
위창휘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10월 말 석달개는 안경(安慶)에서
군대를 일으킨 후 홍수전에게 민의에 따라 위창휘를 죽일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홍수전은 위창휘와 진일강 등 200여명을 죽이고 2개월간 지속된
'천경사변(天京事變)'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11월 석달개는
천경으로 돌아가 홍수전을 보좌하여 조정을 다스리면서 '의왕(義王)'에
추존되었다. 그러나 더욱 의심이 많아진 홍수전은 석달개도 믿지 못하고
그의 무능한 두 형 홍인발(洪仁發)과 홍인달(洪仁達)을 안왕(安王)과
복왕(福王)에 봉하여 석달개를 견제하였다. 석달개는 이 일에 불만을
품고 천경을 떠났다.
태평천국
지도부의 내분으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계속된 정부군의 반격에
태평군은 맥없이 무너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 혁명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왕들과 많은 장병들이 전사함으로써 홍수전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때 젊은 장수 진옥성(陳玉成), 이수성(李秀成)과 홍인간(洪仁玕)의
보좌를 받으면서 다시 힘을 얻은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재건을 기도하였다.
1859년
홍수전은 홍인간을 간왕(干王)에 봉하고 태평천국의 조정을 관장하게
하였다. 홍인간의 급성장에 여러 장수들이 불복하자 홍수전은 다시 진옥성을
영왕(英王), 이수성을 충왕(忠王)에 봉하였다.
1860년
6월 태평군은 다시 소주(蘇州), 가흥(嘉興), 태창(太倉), 가정(嘉定),
상숙(常熟), 청포(淸浦), 송강(松江) 등지를 점령하면서 다시 위세를
떨치는 듯 했으나, 1861년 4월부터 9월까지 격렬하게 전개된 안경(安慶)
전투에서 증국번의 군대에 패하면서 그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9월 5일
안경에서 포위된 1만 6천여명의 태평군은 군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안경의 함락으로 외부 장벽을 상실한 천경은
군사적으로 더욱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안경이 함락된 후 강북
지역의 모든 근거지들도 하나씩 함락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 정부와 연합하여 태평천국의 진압에
나섰다. 연합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태평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이로써 수세에 몰린 태평천국은 천경과 인근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지역을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때 천경은 이미 사방으로
포위를 당하여 고립에 빠졌다. 안으로는 식량이 떨어지고 밖으로는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이수성은 홍수전에게 성을
버리고 탈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천경을 지키다 1864년 6월 1일 향년 51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홍수전이
죽은 후 그의 장남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왕위를 계승하여 유천왕(幼天王)이
되었으나 7월 19일 천경이 함락되었다. 대부분의 태평군은 천경을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부의 병력과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유천왕과 홍인간도 강서에서 체포되어 죽었으며, 이수성도 천경을
탈출할 때 증국번에게 피살되었다.
1851년
1월 11일 금전봉기(金田起義)부터
1864년 천경이 함락될 때까지 14년 동안 농민전쟁을 이끌면서
18개 성, 600여개 도시를 점령하였던 홍수전의 태평천국봉기는 지도부의
분열과 오만으로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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