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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0월, 중프전쟁 이후 위기에 처한 국가 정세에 직면하여, 강유위는 북경에서
순천향시(順天鄕試) 참가를 기회로 광서제(光緖帝)에게
'첫 번째 상서'를
올리고 변법(變法)의 필요성과 절박함에 대해서 진술하였다. 이 상서는
황제의 손에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신사상을 가지고 있던 애국인사들의
입을 통해서 그 내용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어느 정도 사회적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하여 강유위도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91년
강유위는 광주(廣州)로 돌아가서 장흥리(長興里)에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설립한 후, 학생들을 모집하여 학문을 강의하면서 저술을 통하여 유신사상을
널리 알렸다. 이때 간행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에서 그는 서한(西漢) 말에
발견된 고문 경서(經書)를
"공자의 경전이
아니라 유흠(劉歆)이 위조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대담하게도
역대 봉건 통치자들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왔던 유가의 '경전(經典)'을
'위경(僞經)'이라고 선포하고
완고한 보수파의 수구주의를 공격함으로써, 변법유신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강유위는
그의 제자 진천추(陳千秋), 양계초(梁啓超) 등의 도움을 받아 1892년부터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1898년에 간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공자를 혁신의 선구자로 삼고,
공자가 ≪육경(六經)≫을 지은 목적은 요순(堯舜)과 같은 고대 성군의
말을 빌어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여기에서 공자의 이름을
빌어 변법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진화론적 관접에 입각하여 사회 발전 단계를
"거란세(據亂世: 난세), 승평세(升平世: 즉 소강<小康>), 태평세(太平世:
즉 대동<大同>)"의 세 단계로 나누고, "거란세"는 서양의
군주전제시대, "승평세"는 군주입헌시대, "태평세"는
민주공화시대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다소 비과학적인 면도
있지만, 이렇게 구분한 의도는 역사의 발전 변화를 전제로 정치제도(즉
군주전제제도) 변혁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는 데 있었다. 이로써 그의
변법유신은 그 이론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강유위는 5월 2일 북경
회시(會試: 향시에 합격한 거인<擧人>들이 칠 수 있는 과거 시험. 공사<貢士>라 칭해지는
합격자에게는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됨)에 참가한 거인(擧人: 향시<鄕試>
합격자) 1300여명과 연대 서명하여 올린
"공거상서(公車上書: 공거는 거인의 대칭으로 거인들이 올리는
상서라는 뜻)"에서, 청일
강화조약의 거부, 서안(西安)에로의 천도, 군대 양성, 변법을 통한 부국강병책
등을
요구하고, 나아가서 정치, 경제,
문화교육 등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자산계급 개량주의 변법 강령이 형성되었다.
이
상서는 비록 도찰원(都察院)에 의해 이송이 거절당함으로써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을 저지하지 못하였지만, 선비들의 정치참여 금지 규정을 타파하고,
자산계급 유신개혁의 정치강령을 제기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강유위는 유신운동의 영도자가 되었다.
회시
합격자 발표 결과 강유위는 진사에 합격하여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되었다.
이해 5월
29일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세 번째 상서'에서 변법의
이유와 절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천명하고, 부국(富國),
양민(養民), 양사(養士), 연병(練兵) 등의 자강책(自强策)을
건의하였다.
그의
세 번째 상서는 마침내 광서황제(光緖皇帝)에게 전달되어 광서황제의
지지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광서황제는 강유위의 변법을 받아들여
망국의 꼭두각시 황제라는 오명을 씻고 자희태후(慈禧太后: 즉, 서태후)로부터 정권을 찾아오고자
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네 번째 상서'를 올려 "의원(議院)을
설치하여 민심을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유신운동에
대한 사대부와 지식인 계층의 더욱 많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북경, 천진, 상해, 호남, 광동 등지에서 신문을 창간하고
학회를 조직하였다.
1895년
7월, 강유위와 양계초는 북경에서 '중외기문(中外紀聞)'을
창간하였다. 8월(일설에는 11월이라고도 함) 한림원(翰林院) 시두학사(侍讀學士)
문정식(文廷式),
진치(陳熾) 등과 함께 강학회(講學會)를 창립하였다. 이 강학회에서는
'강학서국(講學書局)'을 설립하여 국내외 서적을 번역 출판하였다.
강학회는 10일마다 한번씩 모임을 가졌으며, 한번 모일 때마다 '중국자강학(中國自强學)'을
강론했다. 강학회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일부 관료들이 참가하였는데,
그 속에는 원세개와 같은 군벌들도 끼여 있었다. 이때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강학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895년
10월, 강유위는
상해로 가서 강학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1월에 '강학보(强學報)'를 창간하였다.
그리고 각지에 학회와 신문사 설립을 추진하여 변법유신을 널리 홍보하였다.
1897년
11월, 독일이 교주만(膠州灣)을 강점한 사건이 발생한 후, 광주에 있던
강유위는 급히 북경으로 돌아가
광서제에게 '다섯 번째 상서'를 올려, 변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상서는 공부상서(工部尙書)가 상주(上奏)해 주지
않아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1898년
1월 24일 광서제는 이 상서의 내용을 알고 옹동화(翁同화), 이홍장(李鴻章),
영록(榮祿) 등의 대신들을 파견하여 강유위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이에 강유위는 "선조들의 법을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영록의
주장과 "현재의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홍장의 사상을 반박하고,
변법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서 역설을 하였다. 결국 강유위의
변법 주장은 옹동화의 동의를 얻었다. 옹동화의 추천으로 광서제는 이후
강유위의 상서는 중간에서 누구도 차단하지 말고 그날 즉시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1898년
1월 29일 강유위는 그의 '여섯 번째 상서' "응조통주전국절(應詔統籌全局折)"을
올려 광서제에게 변법의 이행을 주청하였다. 이 상서에 바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정책 강령이 담겨 있다. 2월 다시 '일곱 번째 상서'를 올려
러시아의 피터대제나 일본의 명치천황과 같은 결단으로 변법을 시행하라고
광서제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6월 11일 마침내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의 조서를 반포하여 변법을 선포하였다. 이
유신정부는 이날부터 9월 21일 자희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훈정(訓政:
상황이나 황태후가 황제를 놓아둔 채 정무를 보던 제도)'을 선포하기까지
103일간 지속되었으므로 역사에서는 그것을 '백일유신(百日維新)'이라
한다. 또 이 해는 무술년(戊戌年)이어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유신변법 기간에 강유위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조칙을 기초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교육 등의 각 방면에 대한
개혁을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담사동(譚司同) 등과 새로운 정책을 논의하면서,
서양 자본주의 국가를 모델로 삼고 중국의 국가제도와 사회제도를 개혁하여
민족의 위기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유신변법은 자희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게 되었다. 9월 14일 광서제가 이화원(颐和園)으로 가서 자희태후를
만났을 때 자희태후는 신정(新政)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게다가 당시 궁중에서는 서태후가 황제를 폐위하고 개혁파를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가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강유위 등은
당시 군대의 실력자이던 원세개(袁世凱)의 힘을 빌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원세개는 이미 오래전에 강유위 등과 강학회를 함께 하면서
서로 잘 알고 있던 사이었던지라 그를 자기편으로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유위는
먼저 원세개를 만나 일의 진행상황을 이야기한 후 그의 협조를 요청했다.
일단 원세개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 다시 광서제에게 원세개를 추천하였으며,
9월 16일 광서제는 원세개를 직접 불러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서제를
만난 후 원세개는 광서제와 서태후 사이를 가늠질해 보다가 결국 서태후에게
붙기로 결정하고, 9월 20일 모든 사실을 서태후의 측근 영록에게
밀고해 버렸다.
9월
21일 이 일을 보고받은 자희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중남해(中南海)의
영대(瀛臺)에 구금하고 '훈정'을 선포하였다. 정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자희태후는 강유위와 유신파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으나
강유위와 양계초는 영국과 일본 공사관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파의 핵심인물이던 담사동(譚嗣同), 양예(楊銳),
임욱(林旭), 유광제(劉光第), 강광인(康廣仁), 양심수(楊深秀) 등은
모두 붙잡혀 북경 채소시장에서 참수당했다.(역사에서는 이 6명을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 한다.)
영국
공사관의 도움으로 영국함대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간 강유위는 자기의
호를 갱생(更生)이라 하고, 이때부터 1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다시 일본으로 간 강유위는 1899년
양계초 등과 함께 광서제 보위와 자희태후, 영록, 강의(剛毅) 등의 보수세력 배척을 지도
이념으로 하는 보황회(保皇會)를 창설하여 보황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광서제의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외국인을 도와 의화단을 공격하여 황제를 구출하자"는
주장을 하고, 당재상(唐才常) 등이 이끄는 자립군을 책동하여, 해외에서
경비를 조달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지만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1901~1903년에
그는 인도에서 ≪대동서(大同書)≫, ≪중용주(中庸注)≫, ≪논어주(論語注)≫,
≪춘추필삭미언대의고(春秋筆削微言大義考)≫ 등을 편찬하였다. 그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해야지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된다"는 개혁설을
주장하고 자산계급 혁명운동을 반대했다.
1907년
보황회를 '국민헌정회(國民憲政會: 후에 정식으로 제국헌정회<帝國憲政會>가
되었음)'로 고쳤는데, 이것은 청나라 정부의 헌정 실시를 추진하는
정치단체가 되었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에서 유교회 회장을 맡고 잡지 ≪불인(不忍)≫을
책임 편집하면서, "공화정을
반대하고 국수주의를 보존하자"는 언론을 발표하였다.
1917년
장훈(張勛)과 함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의 황제 복위를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만년에는 상해에서 천유학원(天游學院)을 운영하면서 국학을 강의하였다.
강유위의
저작은 매우 풍부하여 139종에 이르는데, 현재 출판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만 장귀린(蔣貴麟)이 편집한 ≪강남해선생유저회간(康南海先生遺著匯刊)≫,
≪만목초당유고(萬木草堂遺稿)≫, ≪만목초당유고외편(萬木草堂遺稿外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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