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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장개석을 대신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패권 전쟁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철수하자,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도 1950년 1월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때
패권 쟁탈에서 실패한 장개석과 송미령은 비운의 영웅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비극의 여주인공 우희(虞姬)의 신세와 다름 없었다.
1950년대
초는 대만의 정국이 가장 불안한 시기였다. 만약 송미령이 비겁한
여인이었다면 그녀는 결코 대만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장개석과 국민당을 위하여 언제든지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송미령이 단순히
장개석의 권력을 흠모하여 그와 결혼하였다고 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만에서
장개석과 함께 정권의 혼란기를 겪은 후에 그들은 집에 영화관을
설치해 두고 자주 영화를 보면서 다소 한적한 생활을 보냈다.
1974년
국민당 10기 5중전회에서 송미령은 '중산훈장(中山奬章)'을
받았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병사하자 그 해 9월 17일 송미령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여
허리 수술을 받았으며 경과는 아주 좋았다. 그 후 여러 차례 대만으로
돌아가 계속적으로 조금씩 미국으로 짐을 옮겼다. 1991년 그녀가
대만을
완전히 떠날 때는 99개의 상자를 가져갔다고 한다.
송미령은
1950년 1월 미국에서 대만으로 건너가 1991년 대만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약 40여년간 실제로 대만에 있었던 기간은 그 중 절반도
안된다. 그녀는 왜 그렇게 미련이 많은 대만이라는 땅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 원인을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만에는 그녀의 친척이 없었다.(그녀의 친척은 모두 미국에 있었음)
둘째,
이미 미국에서 폐암 말기에 있던 외조카 공령간(孔令侃)과 말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셋째,
장개석과 함께 거주하던 사림관저(士林官邸)는 그녀 혼자 살기에
너무도 적막했다.
넷째,
자신의 건강도 좋지 못하여 움직일 수 있을 때 한시 바삐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대북의 정치적 분위기가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 보다 그녀는 자기 일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제2의 고향 미국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2003년
미국 시간으로 23일 밤 11시 17분(북경 시간 24일 11시
17분) 송미령은 뉴욕에서 향년 106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청대 말기, 민국 시기, 군벌 혼전과 일제 침략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냉전시대의 도래와 퇴출, 양안 관계의 긴장 해소 등을
목도하면서 106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3세기를 살아온 그녀의
가슴에 묻혀 있는 중국 현대사의 상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송미령의 저서로는 ≪서안사변(西安事變)≫, ≪중국의 평화와 전쟁(中國的和平與戰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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