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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0월 25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동경(東京)에서
손문과 결혼한 후,
손문을 따라서 원세개(袁世凱)
타도,
헌법 수호, 서남군벌 토벌 등 일련의 공화제 수호를 위한 정치투쟁에
참가하였다.
1922년
6월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몸을 던져 손문을
위험에서 구해냄으로써 혁명사업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헌신 정신을
발휘하였으며, 그후에는 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이 북경에서 서거한 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견지하면서,
손문의 사상과 혁명사업을 왜곡한 국민당 우파와 과감히 맞섰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협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이 '4.12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모택동(毛澤東),
임조함(林祖涵), 등인달(鄧寅達) 등과 연명으로 <장개석 토벌
전보(討蔣通電)>를 발표하였다. '7.15 왕정위(王精衛)의
반란' 전야에 <손중산의 혁명 원칙과 정책 위반에 대한 항의 성명(爲抗議違反孫中山的革命原則和政策的聲明)>을
발표하고 국민당 우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1927년
'8.1 남창봉기' 때에는 혁명위원회 7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후 비밀리에 소련을 거쳐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세계 사회주의 대국과 자본주의 대국을 순방하였다.
이때 그녀는
마르크스사상을 연구하면서 유럽으로 망명한 중국혁명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의 핵심 문제인 토지와 농민 문제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사상을 비약적으로 성숙시켰다. 이 시기에 국제
반제국주의와 평화수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이후, 1927년과
1929년에 국제 반제국주의 동맹대회에서 명예주석으로 선출, 세계
반파쇼위원회 주요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1931년
중국으로 돌아가 국민당과 그 정부의 모든 직무를 거부하고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면서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대일 타협과 대내 반공탄압 정책을 비판하였다.
1932년
말 노신(魯迅), 채원배(蔡元培) 등과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同盟)'을 조직,
주석에 취임하여 국민당 우파에 대한 투쟁활동과 민주권리를
쟁취하는 혁명가들에 대한 원조 활동을 벌였다.
1933년
상해에서 개최된 극동 반전대회(反戰大會)에서 극동 반제반전동맹(遠東反帝反戰同盟) 중국분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이 시기에 일련의 성명과 정론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과 신민주주의혁명
옹호를 선포하고, 전국민들에게 반일반제 민족혁명전쟁으로 진정한
중국인민정부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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