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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4시에 광주 위술구(衛戌區) 사령 위방평(魏邦平)이 총통부로
부관을 보내어 조건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첫째가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그 부관은 송경령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때 2층 철문이 열리면서 반란군이 진입하였다.
이 혼란 속에서 송경령은 대문을 뚫고 나가 기지를 발휘하여 손에
싸 들고 있던 물건을 땅에 던졌다. 그녀는 반란군들이 그 돈주머니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사이에 그속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때
송경령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던 중이라 행동이 몹시 불편했다.
대문을 뚫고 나온 후에 송경령은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하여 반란군들을
따돌리고 간신히 사면(沙面)의 친구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후 다시 기선을 타고 영남대학(嶺南大學: 지금의 중산대학<中山大學>)
총장 종영광(鍾榮光)의 집으로 갔다. 오랫동안 피로와 긴장에 시달린
탓에 송경령은 종광영의 집에서 유산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그녀의
일생동안 유일한 임신이었다.
이후
송경령은 안전하게 황포도로 가서 영풍함에 승선하였다. 그녀는
"내가 영풍함에서 손문을 만났을 때 사별한 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이 사건에서 송경령이 보여준 용감한
행동으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국민당
중에서 그녀와 손문의 결혼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당원들도 송경령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되었다.
진형명의
반란으로 송경령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유산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녀는 평생동안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여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치유하기 어려운 육체적 정신적 상처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더 넓은 가슴으로 더 많은
사랑을 사랑하면서 무수한 아동들을 위해 더 고귀한 모성애를 발휘하였으니
진정 위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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