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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청말 유신파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자는 복생(復生)이고, 호는 장비(壯飛), 또는 화상중생(華相衆生),
동해건명씨(東海褰冥氏),
요천일각주(廖天一閣主) 등이다.
호남성(湖南省)
유양(瀏陽)
출신으로, 아버지 계순(繼洵)은 호북순무(湖北巡撫)를
역임하였다. 유년기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학대
속에 고통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소년기에는 구양중곡(歐陽中鵠),
도계선(涂啓先),
유인희(劉人熙) 등 유양학자(瀏陽學者)를
사사하였다. 그는 여러 서적을 두루 박람하였데, 특히
장재(張載),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 등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면서, 그들의 민족의식과
애민사상을 흡수하여, 이후 그의 변법유신 제창을
위한 사상적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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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세
사이에 그는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무려 여섯 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 시기에 직례(直隷: 지금의 하북), 신강(新疆),
감숙(甘肅), 섬서(陝西), 하남(河南),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소(江蘇), 안휘(安徽), 절강(浙江),
대만(臺灣) 등지를 유람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청왕조
통치의 부패상과 고통받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세웠다.
이러한 의미로 그는 당시에 자신의 호를 '장비(壯飛)'라
하였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하고 그 이듬해에 '시모노세끼조약'을
체결하면서 주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강유위(康有爲)는
북경에서 '공거상서(公車上書: 공거는 거인의 대칭으로 거인들이 올리는 상서라는
뜻)'를 올리고 자산계급 변법유신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민족의 위기와 유신사상의
격류 속에서 담사동은 사상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30년 동안 정력을 쏟았던 고증학은 현실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기에, 그는
구학(舊學)을 버리고 유신변법에 힘쓰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당재상(唐才常) 등과 함께 유양에
학당을 세우고 신학(新學)을 창설하였다. 그와 동시에
<흥산학의(興算學議)> <보견원정(報見元征)>
등의 글을 지어 변법을 주장, 호남지역에서 유신의
기풍을 열었다. 신사상을 추구하고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는 1896년(광서<光緖> 22)부터 상해(上海), 천진(天津),
북경(北京) 등지에서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서양 서적을 구입하였다. 그리고는 기계, 기선(汽船),
기차, 전선, 석탄, 금광 등과 서양서 들어온 계산기,
엑스선 촬영기 등의 과학기구를 보고,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자연과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또 양계초(梁啓超), 옹동화(翁同和)
등 유신파
인사들과도 폭넓게 친분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변법유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1896~1897년
사이에 그는 상해로 가서 양계초와 학문을 토론하고
변법이론을 연구하였다. 또 양문회(楊文會)와 불교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1896년말에는 다시 남경으로 가서
마음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여, 그의 대표적인 저작 <<인학(仁學)>>
2권을
저술하였다.
그는
세계는 물질의 원소로 구성되며 그 본체가 '인(仁)'이고,
세계의 존재와 발전은 모두 이 '인(仁)'의
작용에 따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인학(仁學)'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연계와
인간사회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며 변화
발전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하늘은 변하지 않고
도(道)도 변하지 않는다.(天不變, 道亦不變)"는
완고한 사상을 비판하면서, 변화 속에서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그의 정치사상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산계급 민권(民權)과
평등 학설을 주장하고,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봉건
전제통치를 통렬하게 비판, 역대 전제군주는 "포학한
독재자"이며 군주전제를 유지하기 위한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참혹한 재앙의 독초"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봉건 군주전제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도
청왕조 통치의 죄악을 폭로하고, "군주가 선하지
못하면 국민이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군주
폐지, 민권 수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정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강유위와
양계초 등 자산계급 개량파의 사상적 범위를 어느 정도
뛰어넘었다.
담사동은
<<인학>>에서 자신의 사회 정치사상을
철학이론으로 승화시켜 개괄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조건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의 철학사상은 번잡하기만
하고 완전한 철학사상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1898년
2월, 담사동은 호남으로 돌아가서 순무(巡撫) 진보잠(陳寶箴),
안찰사(按察使) 황준헌(黃遵憲), 학정(學政) 강표(江標)의
후원 속에 당재상 등과 함께 시무학당(時務學堂), 남학회(南學會),
<<상보(湘報)>>, 연년회(延年會), 군맹학회(群萌學會)
등을 창설하고, 광산 개발과 철로 건설에 참가하면서
변법유신과 신정(新政) 추진을 널리 홍보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신활동이 수구파의 반발에 부딪혔을 때 그는
그들과 단호하게 맞서면서도, "지금 중국은 신구
양당의 유혈이 천지를 뒤덮어야만 비로소 부흥의 희망이
있게 될 것이다"고 생각했다.
1898년
6월 11일, 광서황제는 조서를 내려 변법을 선포했다.
이에 담사동은 광서황제에게 천거되어 8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9월 5일 사품경함군기장경(四品卿銜軍機章京)에
발탁되어 임욱(林旭), 양예(楊銳), 유광제(劉光第)와
함께 신정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에 이들을 '군기사경(軍機四卿)'이라
불렀다.
자희태후(慈犧太后: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봉건 완고파는 신정을 반대하고,
암암리에 정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담사동 등의 유신파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를
설득하여 그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배반으로 자희태후는 9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유신파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담사동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변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외국에서는
변법을 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은 자가 없으니, 중국에서
변법으로 피를 흘릴 자는 나 담사동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고 그의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9월
24일 담사동은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28일 양심수(楊深秀),
양예, 임욱, 유광제, 강광인(康廣仁) 등과 함께 담사동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이 6명의 희생자들을
일러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 일컫는다.
처형되기 직전에 그는 "도적들을 죽이고자 결심하였으나,
국면을 전환시킬 힘이 부족하여, 영광스러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으니, 기쁘고 기쁘구나!(有心殺賊, 無力回天,
死得其所, 快哉快哉!)"라고 하였다. 그의 저작은
<<담사동전집(譚嗣同全集)>>에 편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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