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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홍문(王洪文:
왕홍원, 1935~1992)은
길림성
장춘(長春) 출신으로 일찍이 1950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5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상해 면방직 제17공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면방직 제17공장 보위과(保衛科)
간사를 지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상해 노동자 혁명반란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철로에 가로누워
열차의 운행을 막은 상해 '안정사건(安亭事件)'을 주동하여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를 협박하였다.
1967년초에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과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권력탈취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후 상해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주임을 역임하고, 상해 면방직 17공장 혁명위원회 주임을
역임하였다.
1968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가 다시 신설되자 제3서기를 역임하였으며, 그후
상해시 노동자대표대회 주임, 상해시 노동조합
총연합회 주임, 상해 경비구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9기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기대회에서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임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강청의 당권 및 국가 최고권력 찬탈 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강청
반혁명집단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더불어
'사인방(四人幇)'을 결성, '비림비공
운동(批林批孔: 반모택동 세력 제거를 위해 일으킨 임표와
공자사상 비판 운동)'을 일으켜 주은래(周恩來)를 중심으로
한 원로 무산계급 혁명가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당중앙을
총괄하고 있던 등소평(鄧小平)의 일상적인 업무를 반대하여,
당권과 국가 최고권력을 탈취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북경 제1차 천안문사건의 유혈진압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후 직접 상해로 내려가서 그의 직속하에 있는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상해 민병(民兵) 폭동을 획책하려 하였다.
1976년
10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말소하고 당내외에서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1981년 1월 25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종신토록 정치권리를 박탈당했다.
1992년
8월 3일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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