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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는
원래 당 태종의 양녀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당 태종과 장손황후(長孫皇后)의
양녀로 궁궐에 들어가 깊은 사랑을 받으며 문성공주에 봉해졌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자기를 토번족의 찬보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착잡하였다. 토번의 국왕 송찬간포와 결혼하여 두 민족이 대대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친지라고는 아무도 없고 풍속도
전혀 다른 먼 이역 땅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그러한 문성공주를 위해서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는 각종 가구·그릇·패물·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문학·각종 기술서적 및 의약품·곡물·누에알
등도 있었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들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동불상도 함께 가져갔다.
당시에
토번족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문성공주는 실제로 이러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중국 역사상 왕소군(王昭君)에
이어 두 번째로 화친의 임무를 띠고 이역 땅으로 시집간 여인으로
기록되었다.
정관
15년(641) 정월 문성공주(당시 약 24세) 일행은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북)에서 티벳까지 약 3000km에 이르는 장도에 올랐다.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에
살고 있던 티벳인들은 문성공주 일행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으며,
송찬간포는
그녀를 영접하기 위하여 대규모 영친(迎親) 행열을 거느리고 청해(靑海)까지 달려갔다.
약 한 달간의 긴 여정 끝에 문성공주
일행은 청해 남쪽의 하원(河源: 황하
수원)에 도착하여 송찬간포의
영접을 받았다. 송찬간포는 후행(後行: 결혼 때 신부나 신랑을 데리고
가는 일) 온 예부상서(禮部尙書) 이도종(李道宗)에게 사위의 예를
표하고 찰릉호에서 성대한 영친(迎親) 의식을 거행하였다.
장력(藏曆:
티벳 월력)
4월 15일 송찬간포는 문성공주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서 라싸성으로
들어갔다. 공주의 풍속을 존중한 송찬간포는 특별히 당왕조에서
하사한 화려한 예복을 입고, 티벳인들에게 홍갈색 흙을 얼굴에
칠하는 풍속을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새로 건축한 화려한 왕궁에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는 혼례를 거행하였다.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것은 티벳의 역사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문성공주가 지나간
청장고원에는 지금도 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해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쪽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고향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당 태종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황금으로 일월보경(日月寶鏡)을
주조하여 멀리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이때부터 이 산은 '일월산'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월산을
지나면 도류하(倒流河)가 있는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청해호(靑海湖)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는 이 강을
건너자마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고 초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의 몸이 집에서 점점 더 멀어져감을 느끼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울음소리는 세상의 모든 강물을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였지만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흘러갔다. '도류하'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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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흘린 눈물이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도류하(倒流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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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가
당시에 송찬간포와 즐거운 밀월을 보냈다고 하는
계곡의 집(靑海 貝納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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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는
라싸에 도착한 이후 당왕조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티벳인들에게
전수하여 토번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성공주와 함께 티벳에 들어간 한족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티벳족은 야금·농기구제조·방직·건축·도자기제조·방아·술제조·제지
등의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는
티벳에 급류가 많은 것을 보고 강가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도록 하여
수력으로 방아를 찧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송찬간포는 이러한
기술이 토번의 경제발전 촉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더 많은 기술자들을 요청했다.
문성공주는
또 시녀와 함께 티벳 여인들에게 방직과 자수 기술을 전수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벳 여인들이 짜는 푸루(야크 털로 짠 검은색
또는 다갈색의 모포)와 융단, 모전(毛氈) 등의 기술은 모두 문성공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문성공주는
또 티벳인들에게 천문과 역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장력(藏曆)에서는
한족의 음력 십이지간과 육십갑자에 따라 일시를 계산하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문성공주가 데리고 간 악대는 티벳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악대가 가지고 간 악기는 지금도 50여개나 보존되어
있다. 라싸의 대소사(大昭寺)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그 악기들
중 대부분은 현악기인데 지금 보아도 색채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매년 장력 2월 30일 양보회(亮寶會)가 되면 그것들은 사내의 다른
문물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가 그 멀고 험난한 길에 불상을 가지고
간 것 그 자체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송찬간포도 정치적으로 불교의 교의가 토번족 토속
신앙인 분교(분敎, 분=竹+本) 보다 통치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왕권신수(王權神授) 사상을 빌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찬보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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