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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성명만 쓸줄 알면 될 뿐이고, 검술은 한사람만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향량은
또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지만 그는 대략적으로 대의를 파악한 후에는
더 이상 깊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재주와 기개가 탁월하여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할 때 그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보고는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취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진2세
원년(BC 209)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진나라에
항거하는 농민봉기를 일으켜 장초(張楚) 정권을 세웠다. 6국의 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같은 해 9월에 항량과
항우도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오중(吳中)의 병사들을 모아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군수에 올라 항우를 부장으로 삼고
정예병 8천명을 거느렸다. 진승이 희생된 후 그의 부하 장수 소평(召平)은 진승의
명의를 사칭하여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 초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상국<相國>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급히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항량은 8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갔다.
진2세
2년 3월, 항량이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건넜을 때 동양(東陽: 지금의 강소성 우태현 동남)의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 진영(陳婴)이 이미 동양을 점령한 후 의병
2만명을 거느리고 항량의 휘하로 들어왔다. 또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는 영포(英布)와
포장군(蒲將軍)도 군대를 이끌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로써 항량의
병력은 일시에 6~7만명으로 늘어나서 당시
반진(反秦) 세력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항량은 진승이
확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설현(薛縣: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서
봉기군 장수들을 소집하여 대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양치기를
하던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내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하였다.
그후
항량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동아(東阿: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서남)와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 서북) 등지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항우와 유방(劉邦)도 성양(城陽: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
동남)을 점령하고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까지
진격하여 진나라의 삼천태수(三川太守)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항량은
동아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두 차례나 진나라 군대를
무찌른 데다 항우 등이 또 이유의 목을 베자 더욱
적을 과소평가하고 오만하게 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항량은 전사하였다.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와 유방은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장한은
다시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조(趙)를 공격하고,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섭간(涉間)과
함께 거록(巨鹿: 지금의 하남성 평향현<平鄕縣> 서남)을 포위하였다. 초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군, 항우를
부장에 임명하고 조를 지원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의는 안양(安陽: 지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남)에 이르러 46일간을
머무르면서도 진격은 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는 상장군
송의가 은밀히 제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여 버렸다. 회왕은 즉시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조를 지원하게 했다.
항우는 당양군(當陽君)과
포장군(蒲將軍) 등의 장병 2만명을 파견하여 신속하게 장하(漳河)를 건너
거록의 포위망을 뚫게 하였다. 그리고는 직접 전군을 이끌고 장하를 건너가
배수진을 치고 계속 진격하였다. 아홉 번의 격전 끝에 초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진나라 장수 왕리는 사로잡히고
섭간은 자살하였다. 당시 초나라 군대가 거록을 지원 공격할 때에 함께
달려온 다른 제후들의 군대가
10여 진영이나 있었으나, 그들은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모두 성벽위에서 관전만 하고 있었다. 결국 초나라 군대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다른
제후들의 장수는 모두 항우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각 제후들의
군대는 모두 항우의 지휘에 따르게 되었다. 항우는 여세를 몰아 계속하여 진나라
군대를 대파한 다음 진나라 통치권 내부의 갈등관계를 이용하여 장한의
투항을 받아내었다. 그는 진나라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신안성(新安城) 남쪽에서 진나라의 병사 20만명을 모두 생매장시켜 버렸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 이미 유방이 먼저 함양(咸陽)을
점거하고 있었다. 항우는 초회왕과 "먼저 관중을 차지한 자가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유방이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이때 유방의 신하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화가난 항우는 자신이
보유한 40만 대군의 위력을
믿고 즉시 유방을 없애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미리 간파한 유방은
불리한 전세를 뻔히 알면서 무모하게 항우와 대적하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항우에게
화의를 청하기로 하였다. 유방은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던 항우를
찾아가서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장군과 더불어 죽을 힘을 다해서 진나라를 공격했으니,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움을 벌이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먼저 관중에 진입하여 진나라를 무찌르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뵈올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소인배의 참언이 장군과 신으로 하여금
틈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 측에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유방을 죽이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상태였다. 유명한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살기가 가득한
연회석상에서 유방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으며, 항우는
결국 유방을 없앨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며칠
후 항우는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공략하여 진나라의 왕자 영(婴)을
죽이고 진나라 궁궐을 불태운 다음 무수한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약탈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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