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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주 요 인 물

난세 의  영웅

불세출의 영웅, 아쉬운 패배자 항우(項羽)

 

                          

[항우의 일생]

[ 항우의 실패 원인 ]

 

 

항우와 우희 :

경극 <패왕별희(覇王別姬)>는 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이별장면을 극화한 것이고, 영화 <패왕별희>는 이 경극을 주제로 한 것이다.

 

항우는 유방에 비해 전력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 결국 실패자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그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전쟁터에서 보여준 그토록 용맹을 떨쳤던 사나이다운 기개와는 달리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했던 그에게서 우리는 오히려 무한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지만, 그가 끝내 초한전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데는 또다른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첫째,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략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과시한 것은 차치하고, "키가 8척이고 힘이 세발 달린 큰 솥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의 힘과 용맹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항우는 바로 이러한 힘과 용맹을 바탕으로 숙부 항량을 따라 반진(反秦) 투쟁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항우의 용맹함을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초한군이 광무(廣武)에서 대치하였을 때, 항우는 3명의 장사를 보내어 유방에게 싸움을 걸게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유방의 사수(射手) 누번(樓煩)의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다. 화가 난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집어들고는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다시 그에게 활을 쏘려하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누번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는 황급히 진지로 도망쳐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또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 도망치는 도중에 한나라 장수 양희(楊喜)가 끝까지 추격해오자 항우가 말고삐를 돌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양희의 병사들과 말이 깜짝 놀라 몇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바로 이렇게 삼군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용맹한 힘으로 진나라 말기의 농민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서초패왕에 올라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비록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필부(匹夫)의 용맹함에 불과하였으며, 그에게는 지략이 부족하고 앞을 내다보는 전략이 없었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관중의 왕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의외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리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함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약탈한 재물과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더없이 풍요로운 관중 땅을 고스란히 유방에게 바치고 만 셈이 되었다. 진나라 때의 관중은 험준한 산하로 가로막혀 있는 천연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아 지리적으로 도읍의 가장 적격지였다. 반면 이때의 팽성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험준한 산하도 없고 앞으로 많은 개발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항우는 오히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개인적 영예만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항우는 이후 유방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며, 해하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는 그토록 용맹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라는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황급히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항우는 우유부단(優柔不斷) 하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가기 전에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었고, 유방은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패상(覇上: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모사(謀士)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유방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머뭇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유방의 배반자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밀고하기를, "패공(沛公: 즉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子)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즉시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맹세를 하지만,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유방에게 매수당한 항백(項伯)이 돌아와서 두 세 마디 말로써 설득하자, 항우는 금새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유방의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전군의 지휘자로서 다른 사람이 공격하자고 하면 공격하고 화해하자고 하면 화해하는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는 그야말로 그를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항우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유명한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범증이 여러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잠자코 있자 유방은 첫 번째 위기를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범증이 자객 항장(項莊)을 불러서 검무를 추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유방을 죽이라고 하였지만 항백이 나서서 유방을 암암리에 보호하는 바람에 항장은 손쓸 틈이 없었다. 항백이 취한 비상 수단에도 항우는 오히려 조용히 지켜봄으로써 범증의 계획은 다시 실패로 끝나고 유방은 두 번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항장의 검무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연회석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자 유방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도 없었다. 바로 이때 번쾌(樊)가 뛰어들어 항우를 호통쳐도 오히려 항우는 화도 내지 않고 번쾌를 장사라고 칭찬한 다음 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그 틈에 유방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항우의 가장 큰 실수였다. 입장을 바꾸어 항우가 만약 유방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부드럽게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어떠하였던가? 초한군이 광무에서 대치하고 있었을 때 항우는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였다. 그는 유방에게 "지금 빨리 투항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유방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와 그대는 회왕의 명을 받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그대의 아버지이다. 그대의 아비를 삶아죽이겠다면 삶아죽이고 나에게도 국 한그릇 나누어주기 바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러한 유방의 답변에 결국 항우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정치투쟁에서는 우유부단한 자가 크게 손해를 보고, 칼날이 번뜩이는 살벌한 전장에서는 아녀자의 관용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증은 홍문의 연회가 끝난 후에 항우에게 "에이! 어린아이와는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도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셋째, 항우는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았다.

의심이 많으면 변고가 생기고 변고가 생기면 사람을 잃는다. 이것은 범증의 퇴출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부(亞父) 범증은 70세라는 고령에도 항우를 따라다니면서 작전을 세우고 충심을 다해 항우를 보필하였지만, 이러한 충신도 항우의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BC 208년 4월, 유방이 하남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었다. 이것은 홍문의 연회 이후 유방을 없앨 또한번의 절호의 기회였다. 범증은 항우에게 즉시 형양을 공격할 것을 권했다. 항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유방의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의 관계를 이간질하였다. 이때부터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이에 항우가 범증의 건의를 묵살하자 화가 난 범증은 항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객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항우는 유방을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제업(帝業)을 보좌할 충신을 잃어 버렸다. 여기에서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은 항우의 실책을 엿볼 수 있다.

 

넷째, 항우는 잔인하고 포악하였다.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은 반드시 민심을 잃고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간 이후에 이미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함양성을 약탈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인 다음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3개월이나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재물과 아녀자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강도와 다름없는 행위였으니, 후에 진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항우는 천하의 비난을 무릅쓰고 숙부와 함께 내세웠던 의제(義帝) 초회왕을 죽였다. 초회왕은 비록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당시 진나라의 폭정에 대한한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항우의 이러한 의롭지 못한 행위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고 정치적 고립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방은 민심을 수습하고 민의에 따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공포하여 관중의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 하였다.

항우는 그의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로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해하(垓下)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후에 음릉(陰陵)에 이르렀을 때 한 농부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 농부는 오히려 항우를 속이고 길을 잘못 가르쳐줌으로써 한나라 군대의 추격을 계속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 항우는 끝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고 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항우의 일생]   [항우의 실패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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