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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설은 전설로 그칠 뿐 역사적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의
장례제도로 보나 이치상으로 보더라도 동태후가 서쪽에 묻히고 서태후가
동쪽에 묻히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동태후와
서태후의 명칭은 능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생전에
살았던 처소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었다. 자안태후는 생전에 자금성
내의 동쪽 종수궁(鍾粹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동태후라 일컬었고,
자희태후는 서쪽 저수궁(儲秀宮)과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서태후라 일킬었던 것이다.
당시의
장례제도에 의하면 지위가 높고 지친인 사람의 능을 가운데 상전의
능에서 더 가까운 쪽에 놓았다. 강희황제의 경릉(景陵), 건륭황제의
유릉(裕陵), 도광황제의 모릉(慕陵) 지하궁에는 모두 많은 후궁들의
능이 함께 안장되어 있는데, 황후의 능을 황제의 왼쪽에 두고 후궁들은
순서대로 그 왼쪽이나 오른쪽에 두었다. 함풍황제의 정릉(定陵)은
서쪽에 있는데, 지위가 높은 동태후의 능은 당연히 정릉에서 가까운
쪽에 있어야 하고, 서태후의 능은 상대적으로 정릉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동태후의 능이 서쪽에 서태후의 능이
동쪽에 위치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청대의 황제와 황후의 능에 나 있는 신도(神道)는 모두 신분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자희릉의 신도는 자안릉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고, 자안릉의 신도는 정릉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릉의 신도는 효릉(孝陵: 순치황제)의 신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자안태후의 지위가 서태후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현존하는
청대 황궁의 기록과 관련 문서를 통해서도 애초에 능원을 조성할
때부터 동태후를 서쪽에 서태후를 동쪽에 두기로 확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태후의 능은 모두 정동릉(定東陵)이라 부른다. 자안릉은 보상욕(普祥峪)에 있고 자희릉은 보타욕(菩陀峪)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자안릉을 보상욕 정동릉, 자희릉을 보타욕 정동릉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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