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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문학사의 시기 구분은 그 방법이 다양하다. 먼저 본고에서는 항전(抗戰)이 중요한 분기점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 가치의 구조상에서 지식인 계몽문화 경향이 국가권력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현실투쟁 정신 전통, 민간문화 형태로 삼분된 것 외에도, 지역적 분포상에서도 정치 구조에 상응하여 공산당 치하의 항일민주근거지와 해방구의 문학, 국민당통치구의 문학, 점령지역의 식민지문학의 3대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1949년 이후에는 문학의 기본 구조는 변화되지 않고, 지역적 분포 상황만 변화되었다. 공산당이 통치하던 지역은 대륙 전체로 확대되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지역은 대만열도로 축소되었으며, 반환전의 홍콩과 마카오 지역의 문학은 여전히 식민지문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항전 이후의 문학사를 해방구문학, 국통구문학, 점령지문학으로 나누어서 연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문학사를 연구할 때도 대륙문학과 동시에 존재하는 대만문학과 홍콩 마카오의 문학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러한 공간적인 구분은 불가피한 것이다.먼저 본고에서는 1949년 이후의 대륙지역의 문학사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시기 구분도 상대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음을 밝혀 둔다. 따라서 본고에서 취한 당대문학사의 시기 구분은 임시적인 한 방편일 뿐이다. 대체적인 문학창작 배경에 따라서 중국 당대문학사의 시기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제1단계 : 1949∼1978년 1949년 7월, 중화 전국문예예술가 대표대회(中和全國文藝藝術工作者代表大會, 약칭 "제1차 文代會")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특징 중 하나는 오랫동안 두 개의 지구(국민당통치구와 공산당 치하의 해방구)로 분리되어 있던 문학 관계자들이 마침내 함께 만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5.4" 신문학의 투쟁 전통과 전쟁 중에 형성된 해방구의 문화 전통이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합류하였으며, 모택동이 <연안문예 좌담회에서의 담화(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에서 규정한 중국문예의 새로운 방향을 전국 문예사업의 방향으로 공인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회는 일반적으로 "당대문학의 서막"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반세기에 달하는 중국 전쟁 국면의 종식을 의미한다. 비록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서로 대치하였지만, 그리고 중국대륙의 공산당정권이 장기간 냉전의 위협 속에서 한차례 인접 국가의 군사적 충돌에 말려들기도 하였지만(한국전쟁), 중국대륙 내에서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종식됨으로써 중국은 평화적인 경제건설의 시기로 진입할 수 있었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7기 2중전회에서, 전국 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산당의 사업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진 만큼,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도시의 관리와 건설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문화 규범은 경제 기초의 변혁보다 훨씬 완만하게 형성되고, 전후(戰後)의 사회생활 속에 남아있는 전쟁의 영향은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깊고도 넓었다. 모택동의 이러한 경고는 30년 후의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의사 일정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몸에 화약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람들은 평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즉, 현실적 이성과 정치적 열정의 기묘한 결합, 영웅주의 정서의 만연, 대립적 사유 양식의 보편적 응용,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지배적인 정서, 서양문화에 대한 본능적 거부 등과 같은 이러한 전쟁문화의 심리적 특징은 전쟁이 끝난 몇 십년 후에도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정서의 제약 아래에서 문학에 대한 관념도 군사적 노선에서 정치적 노선으로 전이되었으며, 두 진영의 대립적 사유 양식은 구체적으로 계급투쟁만을 강조하는 교조주의로 표현되었다. 문학 외부에서는 일련의 정치비판 운동을 통하여 지식인의 "소자산계급" 적극성을 개혁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완벽한 무산계급 문예대군"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실현하였다. 문학 내부에서는 마치 "기어와 나사"의 관계처럼 문학을 "전체 혁명 기구의 한 구성 부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예 사상과 정책은 모두 이 시기의 전쟁문화 규범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문학사연구에서 많은 연구가들은 이 시기에 문예창작 규율을 위반한 현상을 당시 중국공산당내에서 한차례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였던 "극좌노선"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노선은 결코 아무런 근거없이 주관적으로 구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하에서 사회문화적 심리와 노선 결정자의 사상 감정의 일치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의 문학비평 용어에 전쟁을 상징하는 어휘가 수두룩하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시기에 전쟁문화적 정서가 얼마나 널리 깔려 있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대가 합류하다(會師)", "승리(勝利)", "전역(戰役)", "홍기를 세우다(揷紅旗: 철저히 마르크스 레닌주의사상을 지니고 그에 의해서 행동하다는 것을 비유함)", "백기를 뽑다(拔白旗: 부르조아적인 낡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고치다는 것을 비유함)", "문예대군(文藝大軍)", "중대한 제재(重大題材)", "광폭하게 진공하다(猖狂進攻)", "뱀을 굴에서 나오게 유인하다(引蛇出洞: 적을 밖으로 유인하다는 것을 비유함)"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문학창작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전투를 시작하였다(打響了)"고 하고, 작품이 참신하다는 것을 "돌파함이 있다(有突破)"라고 하였으며, "전투(戰鬪)", "투쟁(鬪爭)", "무기(武器)" 등과 같은 군사용어는 말할 수 없이 많이 상용되었다. 이러한 전쟁문화적 정서 속에 있던 문학관념은 자연히 당대문학의 창작과 비평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창작면에서 보면, 당시의 작가들은 대부분 군사적 승리로 고무된 전쟁문화 정서에 부응하여 시대적 정신을 열정적으로 노래하였다. 이 시기의 전쟁문화 규범은 문학관념상에서 문학창작의 정치적 목적성과 공리성을 강조하거나, 전시에 두 진영이 대치하던 대립적 사유 양식을 운용하여 창작을 구상하거나(즉 적과 나의 진영이 아주 분명함), 영웅주의와 혁명낙관주의를 강조하는 것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당대 지식인 전통의 복잡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대문학의 흐름 속에는 "5.4" 신문학의 전통이 은연히 남아있으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문학적 이상 추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중국문학과 구소련문학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중요한 현상을 지적하기도 한다. "소련문학에 대해서 말하면, 에세닌(Esenin), 부티닌(Butynin), 아흐마토바(Akhmatova), 츠베테바(Tsvetaeva), 파스터낙(Pasternak) 등을 대표로하는 전통으로, 그것은 인성과 사람의 정신적 상황을 중시하는 전통이다. 중국문학에 대해서 말하면, '5.4' 작가의 계몽 책임과 문인 의식을 부활하여 문학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재건한 것이다."
이 전통은 작가들이 각종 예술적 기법을 운용하여 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학의 진실성 추구를 표현할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특히 지적할만한 것은 당대문학사상 진실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 많은데, 이것은 작가가 불공정하게 창작권을 박탈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문학에 대한 열정을 안고 비밀리에 창작활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의 창작 현상에 대해서도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다. 즉, 당시의 많은 작가들, 특히 해방구문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작가들은 중국의 농촌 상황과 농민의 문화적 정서, 민간 문화의 표현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그들의 창작 속에 "민간 은형(隱形) 구조"의 예술 기법을 의식 무의식적으로 운용하여, 작품의 중심 사상을 구성하고 진실된 사회 정보를 자세하게 전달함으로써 풍부한 생명력을 갖춘 예술 특색을 구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전통은 당대문학사상 특정한 역사 환경 속에서 모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5∼60년대 중국의 정책 결정권자는 전쟁을 주요 특징으로 삼는 문화 규범과 그러한 문화적 정서가 평화 시기의 경제건설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대규모의 급격한 계급투쟁을 매듭짓고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모택동은 "백화제방, 백화쟁명(百花齊放, 百花爭鳴)"의 "쌍백방침(雙百方針)을 제기하였다. 전쟁문화 규범과는 전혀 다른 이 방침은 확실히 평화시기의 문화 건설을 조정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그후 주은래(周恩來)와 진의(陳毅) 등 중국공산당 고급 관리들도 지식인 문제와 문예사업에 대하여 일련의 담화를 발표하여, 나날이 심각해지는 문화규범과 경제건설의 부적응성 및 당과 정부와 지식인의 긴장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내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속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그다지 좋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군사체제를 극단적으로 이상화한 문화대혁명을 불러일으켰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된 문화대혁명으로 문학은 전례없는 재난을 만났다. 이전의 문학사에서는 모두 문화대혁명 시기를 별도의 한 단계에 두었다. 당시에 공개적으로 발표된 문학창작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러한 시기 구분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잠재 창작"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참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혁" 이전과 "문혁" 시기에 중국대륙의 당대문학에는 여러 차례의 정치운동 중에 창작권을 박탈당한 지식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이상과 감정을 표현한 잠재적인 창작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5∼60년대의 녹원(綠原), 증탁(曾卓), 우한(牛漢), 목단(穆旦), 당식(唐湜) 등의 시가, 장중효(張中曉)의 수필, 풍자개(豊子愷)의 산문, 심종문(沈從文)과 부뢰(傅雷) 등의 편지에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운명과 사상 경향, 창작 풍격은 다르지만, 여전히 하나로 이어지는 지식인 정서가 담겨있다. 이러한 창작들의 원고가 당시의 정치적 환경에서 발표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는 한 시대의 진귀한 문학적 소리가 충만하게 남아있으며, "문혁" 이전이나 "문혁" 시기의 창작 사이에 실질적인 구분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학사를 고찰한다면 "문혁" 이전과 "문혁" 시기의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비교적 큰 문학사 단계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2) 제2단계: 1978∼1989년 당대문학사의 제2단계는 "문혁"이 끝난 1976년이 아니라 1978년부터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의 "부활"은 1978년 8월에 시작된 "상흔문학(傷痕文學)"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상계에서 전개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토론과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제정한 "전당의 사업 중점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라는 결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첫째, 항전 이래 40년간 중국의 문화 구조에 영향을 미쳐왔던 전쟁문화 규범이 부정되고, 중국이 진정으로 평화적인 경제건설 시대로 진입하였다. 둘째, 사상해방 노선과 개혁개방 노선이 상호 보완작용을 하면서 현대화를 목표로 나아가는 역사의 진행 과정을 촉진시키고 보장해주었다. 1979년 10월에 개최된 중국문학예술관계자 제4차 대표대회(약칭 제4차 文大會)는 중국문학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공산당 중앙을 대표하여 이 대회에 참석한 등소평(鄧小平)은 축사에서 문예사업에 대한 당의 입장을 천명하면서, "무리하게 간섭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밝히고 문예창작이 복잡한 정신노동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당은 "문학예술을 일시적, 구체적, 직접적 정치 임무에 종속시키지 않고, 문학예술의 특징과 발전 규칙에 의거하여 문예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문학예술 사업을 번성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지적하였다. 1980년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문예는 인민과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다소 포괄적인 방침을 공식적으로 제정하여,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담화>에서 강조한 "문예는 노동자 농민 군인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와 "문예는 정치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구호를 대체하였다. 1984년 중국공산당 중앙을 대표하여 제4차 작가대표대회에 참석한 호계립(胡啓立)은 축사에서, 먼저 과학적인 태도로써 역대 문예사업에 대한 당의 오류를 총괄하고 "창작의 자유"를 승인하였다. 비록 이 작가대표대회의 노선이 그대로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문예정책의 조정을 통해서 건전한 문학환경의 점진적인 형성과 평화적인 경제건설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 규범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새로운 문화 규범의 형성은 당연히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전쟁문화 규범이 남겨둔 심리적 흔적도 즉시에 사라지지 않았으며, "계급투쟁"을 강조한 대립적 사유 양식은 역사적 사유 관성의 일종으로서 여전히 당대의 사회 생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혁" 이후의 모든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둘째, 지식인에 대해서 여전히 "소자산계급"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평가하였다. 셋째, 서양문화에 대해서 여전히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넷째, 역사적 교훈으로 오류가 판명된 무슨 운동을 펼치는 식의 방법으로 문예사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80년대의 문학사는 과도기적 특징이 충만한데, 그것은 바로 평화적인 경제건설 중심의 새로운 문화 규범이 탄생되기 전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변모와 극기의 아픔이었다. 문학창작과 문학이론면에서 "상흔문학" 이후로 새로운 창작과 이론의 모색은 모두 강렬한 반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방향의 모색과 창조는 항상 완벽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도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80년대의 문학은 생동적이고 참신한 정서가 충만하다. "5.4" 신문학 전통도 점차 활기를 회복하였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한 연구가의 "5.4" 전통에 대한 개괄은 "5.4 작가의 계몽 책임과 문인 의식을 부활하고, 문학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재건한 것이다." 이 이론의 개괄은 "5.4" 전통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포괄하고 있으며, 항전시기 호풍의 "5.4" 신문학 전통에 대한 재건에 비해서, 이렇게 문학 자체의 가치를 중시한 것이 더욱 객관적인 진실에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계몽 책임"과 "문인 의식"은 "5.4" 정신 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된 통일체가 아니라, 지식인이 고대 사대부 계층에서 현대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 체현한 두 종류의 가치 취향이다. "계몽 책임"은 지식인이 전통적인 귀족적 가치 취향을 탈피한 후에도 그 사유방식과 가치관념은 여전히 구국적인 방향을 따라 발전하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목표를 민중에게로 돌려 계몽을 통하여 민중을 일깨우고 교육하여, 민중의 역량으로 사회적 개혁과 진보를 추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노신(魯迅)은 계몽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노신의 투쟁 정신은 줄곧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문혁"이 끝난 후 갖은 고초를 겪은 지식인들은 마침내 각성하여 몇 십년간 국가와 민족과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5.4" 지식인 현실 투쟁정신도 다시 발출되기 시작하였다. 원로 작가 파금(巴金)은 앞장서서 "문혁"을 반성하고 자신의 교훈을 총결한 ≪수상록(隨想錄)≫을 발표하여 젊은 작가와 문예이론가들이 이러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도록 고무하였다. "문인 의식"이란 단어는 의미가 다소 모호하다. 신문학 역사상 다른 지식인 그룹은 중국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은 충만하였지만, 계몽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서는 오히려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들은 나아가서 계몽의 추구를 포기하고 민간에서 자신의 직분과 전문적 가치 기준을 확립하면서, 문학창작의 전문 영역에서 문학예술 자체의 특징에 대한 중시와 탐구를 표현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이것을 "문인 의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전의 문학사 저작에서는 이러한 전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문혁"이 끝난 후 80년대 문학창작 속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이 영역에서 새로운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원로 작가 손리(孫犁)의 수필과 왕증기(汪曾祺)의 소설 등은 모두 민족적 색채가 농후하고 미문(美文)으로 쓰여져 당대의 작가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바로 "5.4" 전통의 부활로 볼 수 있다. 당대에 있어서 "5.4" 신문학 전통의 역사적 의미는 역사 정신의 중시에 그치지 않는다. "5.4" 전통은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 왔기에 거기에는 당연히 당시의 시대적 정신과 현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사람들은 "문혁"의 아픈 기억에서 갓 깨어나 강력한 정신적 전통을 바탕으로 그들의 역사 반성과 현실 참여를 지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5.4" 정신의 전통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5.4"시대의 원로 작가들이 "문혁" 이후에 새롭게 창작 열정을 발출한 것 외에, 이 시기의 문학 진영은 주로 두 세대의 작가군으로 구성되었다. 한 세대는 50년대에 성장한 작가들로, 그들은 공화국 초기의 이상주의 분위기 속에서 문학창작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쌍백방침" 시기에 사회나 인성에 대한 감성적 인식을 진실되게 표출하였다는 이유로, 1957년의 "반우(反右)" 운동 중에 부당한 비판과 공격을 받고 사회 밑바닥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문혁"이 끝난 후에 그들은 다시 문단으로 돌아와 80년대 문학창작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창작속에는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 정신과 인성에 대한 찬미가 충만하여, "5.4" 전통의 정신적 주제가 당대에 재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한 세대는 "문혁" 중에 성장한 작가들로, 그들은 청소년 시기에 일찍 허위적 이상주의에 기만 우롱당하는 쓰라린 체험을 맛보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일찍이 노동현장으로 방출되어 민간생활과 민간문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창작을 시작하였을 때는 자연스럽게 농촌생활의 경험 속에서 소재를 취하여, 지식청년 제재에서 뿌리찾기 문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민간화의 창작 경향을 반영하였다. 부활된 "5.4" 전통 속에는 그러한 "문학 자체의 가치를 다시 중시하자는 입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혁" 후의 문학이론과 문학창작 속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문학이론상에서는 "문학 주체성" "소설형식 탐색" "모더니즘 기교" 등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였는데, 그것은 비록 성숙되지는 못하였지만 문학 자체의 가치에 대한 이론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교해 보면 문학창작의 의미가 좀 더 크다. 많은 작가들은 서양의 모더니즘 사조를 모방하여 현대인의 감정 의식을 표현하는 예술적 공간을 크게 개척하였다. 처음에는 서양의 모더니즘 기교에 대한 모방에 형식주의가 분리되는 느낌도 있었지만, 많은 작가들의 실천을 거치면서 그것은 점점 원숙해지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언어 형식이 민족언어의 표현 속으로 융화되면서, 그것은 현대문학의 예술적 표현 전통을 약화시키지 않고 풍부하게 하였다. 특히 현대시가의 표현 형식 방면에서 "문혁" 시기 지식청년들의 지하시가(地下詩歌)를 근원으로 삼는 "몽롱시(朦朧詩)"의 창작은 "5.4" 신문학 중의 현대시 전통과 결합하여, 시가 언어의 미학 원칙을 쇄신하고 시가 영역에서 개인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표현기교상의 검토이지만, 90년대 문학창작 중의 서사적 언어의 변화와 개인 입장의 출현에 대하여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3) 제3단계: 90년대 90년대의 문학을 별도로 하나의 문학 단계로 설정하는 견해는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았다. 90년대 문학이 하나의 새로운 문학 단계로서의 특징을 완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80년대를 문화상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정상을 회복하는 과도기라 한다면, 90년대는 새로운 문화적 활력과 특징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특징은 20세기 문학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미성(尾聲)에 불과할 뿐, 많은 중요한 성과는 아직도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신세기 문학에 대한 전망으로, 그것의 많은 특징들은 모두 미래에 더욱 많은 발전 가능성이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중국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 영역의 개혁개방이 가속화되고 상품경제 의식이 각종 사회문화 영역으로 끊임없이 스며듦에 따라, 사회경제 체제도 궤도를 바꾸어 약 40년간 중국을 통치해 온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가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신속히 전환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의식형태의 구조도 이에 상응한 조정이 일어났다. 80년대는 지식인의 엘리트의식이 가장 활발하고 고조된 시기였지만, 9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지식인들은 가혹한 시련을 맞이하였다. 즉,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계몽주의와 엘리트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언어를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주관적으로도 자신의 엘리트의식에서 표현된 경솔과 허망의 결함을 반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공명(共名)" 상태에 있던 지식인 특유의 일원적 정치사회 이상이 약화되고 다원적 문화구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90년대 초기의 기본적인 문화 특징이 급격하게 조성되었다. 문학창작상에서 작가들은 웅대한 역사적 서사를 버리고 개인적 서사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특히 이로부터 민간 입장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능동적 동화를 향하여 나아갔다. 신문학의 전통은 90년대에 새로운 활력을 발휘하였으며, 계몽문화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 시대에 새로운 요소는 오히려 당대문학에 참고가 되었다. "5.4" 이래의 문학역사상에서 대다수의 시기는 모두 시대적 "공명" 상태에 처해있었다. "5.4" 시기의 "반제 반봉건"과 "개성해방", 항전시기의 "민족구원", 5∼60년대의 "계급투쟁" 등과 같이 어떤 시대적 주제는 한 시기의 사상 문화를 지배한다. "공명"은 시대의 중심 사조를 개괄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사회적 견해를 표현하는 주요한 참고가 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시대의 관건이 되는 말을 통하여 예술 능력의 고저에 관계없이 그가 창작한 작품을 모두 시대에 동화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상황속에서는 작가의 독창성이 묻혀질 가능성이 크고, 작가의 개인적인 요소가 "공명"과 긴장 관계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 "공명"과 대립된 개념은 "무명(無名)"이다. "무명"이란 시대적 주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가지 주제가 공존하는 것을 가리킨다. 문화사업과 문학창작은 모두 시대의 한 주제를 반영하지만 "공명"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다. 20세기 중국문학사상 "무명"의 문화적 상황이 출현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30년대 "경파(京派)"의 문인권 문학, 남경 관방(官方)의 "민족주의" 문학, 상해의 좌익문학, 해파(海派)의 도시문학, 대중의 소비문학, 동북의 유망문학(流亡文學) 등의 여러 가지 상호 대립적인 문학사조가 병립한 구조, 이러한 문학사조 사이에는 비록 상호 충돌이나 격렬한 투쟁은 없을 지라도, 결코 문단을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시킬 수도 없다. 이러한 구조는 "무명" 문화 상태에 더 근접해 있는 것 같다. 90년대의 문학을 살펴보면 거기에 내포된 "무명"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 80년대 문학사조가 선형적으로 발전하던 문학사의 방향이 타파되고, 사조와 방향, 공명이 없는 현상이 출현하여 다양한 문학 경향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다원적 가치 취향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홍보형 문예작품은 일반적으로 정부기관의 경제적 지원과 국가적 후원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하고, 소비형 문학작품은 대중문화 시장을 확보하는 판촉의 성공을 목표로 삼으며, 순문학 창작은 그 영역내의 전문가의 인정과 특정 독자군의 호응을 지표로 삼는다. 즉, 국가권력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현실투쟁 정신 전통, 민간문화 형태로 삼분된 구조가 더욱 견고해졌다. "무명" 문화 상태에는 여러 가지 시대적 주제가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단계 복합 문화구조를 구성해야만 비로소 문학이 다양하게 발전하는 자유로운 국면이 출현할 수 있다. 둘째, 작가의 서사적 입장이 공동의 사회적 이상에서 개인적 서사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90년대는 많은 작가들의 사회 역사 관점이 매우 비슷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체험한 시대적 상황을 서사하였다. 비교적 우수한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독립된 정신 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은밀한 경험에 결부시켰다. 셋째, 시대적 "공명"의 상실로 자아를 마주한 작가들은 개인의 심리 공간 개척이라는 측면에서 창작 실험을 실현할 수 있었다. 개인 입장의 서사로부터 문학창작은 웅대한 서사 양식에서 벗어나 생활 자체의 개인적 서사 방식으로 전환되었으며, 그에 따라 "신생대(新生代)"라 일컬어지는 청년작가와 여성작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문학은 마치 하나의 흩어진 조각 세계와 같아서 작가들이 각자 다른 입장에서 창작하였는데, 전통적인 엘리트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한 것, 시장경제 발전 중에 나타난 대중의 소비문화를 표현한 것, 민간의 입장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논한 것, 극단적 개인세계로 전환하여 각양각색의 사생활을 묘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명" 상태 가 처음에는 생소하고 혼란스러워 보여졌지만, 결국에는 문학이 시대적 "공명"의 제약을 벗어나 사회 문화 공간 속에서 독립적인 소리를 발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환경 속에서 점점 자신의 창작 풍격을 성숙시켜 우수한 작품을 더욱 많이 써내었다. 왕안억(王安憶)의 ≪삼촌 이야기(叔叔的故事)≫, 사철생(史鐵生)의 ≪나와 지단(我與地壇)≫, 장승지(張承志)의 ≪심령사(心靈史)≫, 장위(張위)의 ≪구월우언(九月寓言)≫, 여화(余和)의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 한소공(韓少功)의 ≪마교사전(馬橋詞典)≫ 등은 모두 중국의 20세기 마지막 10년 문학계의 중요한 수확인 동시에 20세기 문학계의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했다고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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