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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현 대 문 학

노신의 광인일기

 

 

- 전통에 도전한 중국최초의 현대소설 - 

☞ 유교적 사회를 식인사회로 규정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된 <광인일기>를 일반적으로 노신(魯迅)의 첫 번째 소설이자 중국 현대문학사상 맨 첫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할 무렵 노신은 북경에서 교육부의 한 관리로 있으면서 답답한 나날을 고서의 교정과 금석탁본의 수집 또는 불전(佛典)의 연구 등에 몰두하는 것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노신 자신의 서술에 의하면 그때 그는 S회관에서 여러해 동안 고비(古碑)를 베끼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신정부의 교육부 사회교육사(社會敎育司) 제1과장이 되어 북경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후 그가 거주했던 소흥회관(紹興會館)의 등화관(藤花館) 보수서옥(補樹書屋)에서 처음에는 북양정부(北洋政府) 정보원의 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고비를 베끼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재미가 붙어 하나의 정밀하고 믿을 수 있는 고비문정본(古碑文定本)을 정리해 내볼 요량으로 고비를 베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신청년≫ 동인의 한사람이며 노신과 동성(同省) 출신인 전현동(錢玄同)이 찾아와 ≪신청년≫에 글을 쓰도록 권해서 써낸 것이 바로 3편의 백화신시(白話新詩)와 함께 발표한 <광인일기>였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여러해 동안의 사색과 관찰이 누적되어 이 소설이 탄생된 것이다.

수많은 상징과 우언 및 전고를 사용하여 쓴 초현실적인 수법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노신은 입으로만 인의(仁義)를 말하는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를 식인(食人)의 사회로 규정, 중국 전통의 도덕교화(道德敎化)·가언의행(嘉言懿行)은 일종의 가도학(假道學)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중국사회를 암흑으로 뒤덮은, 버려야 할 유산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신 특유의 백화체로 구도덕에 대한 통렬한 부정, 인간성의 해방, 그리고 새세대에게 걸어보는 희망을 기저로 하여 이 작품을 썼다. 그러나 서양 전통의 사실소설(寫實小說)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일기이지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는 일정한 플롯도 없다. 그리고 사용된 문장도 백화체로만 일관한 것이 아니다. 즉 노신은 이 일기를 발표할 때 문언문으로 소개하는 말을 써 본문 앞에 덧붙였다.

 

"어느 형제가 지금은 그 이름을 감추고 있는데, 모두 나의 예전 중학교 시절 친구들로서 여러해 떨어져 있어 소식이 점차 멀어졌었다. 얼마 전 우연히 그 중의 하나가 큰 병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 고향에 돌아가는 주에 길을 돌아서 찾아가 한 사람만 만났더니, 병이 든 사람은 그 동생이었다고 했다. 일부러 먼길을 와 찾아보았으나 벌써 병이 나아 어느곳 시보(試補)로 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웃고 일기 두권을 보여주며 당시의 병세를 알 수 있다면서 옛 친구이니 주어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와 한번 훑어보고 앓았던 병이 대략 "피해망상증"류의 것이었음을 알았다. 문장에 전혀 두서가 없고 황당한 말이 많으며, 월일이 적히지 않았으나 먹 색깔과 글자 체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시에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간혹 연결이 닿는 것도 조금은 있어, 지금 한 편을 적어 의학자의 연구자료로 제공한다. 기록 가운데 잘못된 말이 있어도 하나도 고치지 않았고, 인명은 모두 시골 사람들이어서 설사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체 줄거리에는 무관하겠기에 다 바꾸어 놓았다. 서명은 본인이 병이 나은 뒤에 붙인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1918년 4월 2일 적음."

 

이상 인용한 서문은 고문(古文)의 규칙에 맞추어 전통적인 문언문으로 씌어져 있다. 이는 일반 세속의 심태(心態)와 일기 속의 세계가 일종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고, 노신은 일부러 이러한 수법을 써서 독자들을 격동의 세계로 몰고 간 것 같다.

일기 속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잡아먹을까봐 항상 두려워하고, 심지어 이웃집 개가 자기집 형에게 가까이 오기만 해도 개가 자기를 잡아먹지나 않을까 의심을 하며, 그의 이 피해망상증 증세는 더욱더 심해져 간다. 그래서 일기 속의 주인공인 광인의 심태를 일반 세속의 그것과 구별하여 백화로 나타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언문학에 반대하기 위하여 구어라면 무턱대고 좋다는 당시 개혁파들의 주장에 노신은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문장을 구어체로 쓰는 데는 광인의 수기라는 가탁이 필요했고, 그러면서도 서문은 문어체로 써서 호적(胡適) 등을 은근히 비꼬았던 것이다.

 

☞ "달" 이미지 이용, 광인(狂人) 생각 서술

사실상 노신은 이 소설을 통하여 "禮敎吃人 -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 5·4기의 한 구호를 외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광인의 수기라는 가탁을 쓴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대담한 파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교윤리의 허위성을 밖에 서서 폭로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서사형식으로도 표현해낼 수 있었을 것이나, 그 허위가 자기 자신에게도 뿌리깊이 박혀 있어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주인공을 광인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 작품은 노신이 처음 백화로 쓴 글이었고, 문중에 나오는 백화문은 "오늘 밤 매우 밝은 달빛(今天晩上, hen好的月光)"이란 말에 이어 다음과 같이 그 첫 단락이 이어진다.

 

"나는 달을 보지 못한 지 이미 30여년, 오늘 밤 보자 정신이 유별나게 상쾌했다. 지난 30년 동안 내내 정신이 나가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지만, 그러나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그 자오씨 집 개가 왜 나를 두 번이나 보았겠는가? 내가 두려워할 만도 하다."

 

아주 간략간략한 백화문으로 시작된 이 일기의 문장이 그 앞의 문언문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고 있는 배경은 낮이 아니라 밤이다. "매우 밝은 달빛"이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주인공인 광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가슴이 툭 틔어 비로소 "매우 밝은 달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라틴어로 "달"이란 뜻의 단어 "luna"가 정신착란이란 뜻의 영어 단어 "lunacy" 혹은 "lunatic"과 관련이 있고, 서양에 보름날 달밤이면 사람이 쉽게 미치거나 범죄를 짓게 된다는 말이 있음을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의학을 공부했고 서양의 심리학 서적을 적잖이 읽었던 노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임을 감안할 때, <광인일기> 중의 "오늘 밤 매우 밝은 달빛"은 작자가 의식적으로 쓴 은유가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노신의 문장 가운데 "달" 여러 군데 나오고 그때마다의 용의(用意)가 각기 달라 그 사실 여부는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노신은 이 "달" 이미지를 이용하여 광인의 생각을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3단락으로 된 이 일기는 각 단락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매우 두서가 없어 보인다. 균형의 조화를 따지는 고문과 비교해 너무나 판이하다. 노신은 이처럼 고문의 규격을 타파한 두서없는 문체를 빌어 그 광인의 어지러운 생각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 어린 아이들을 구하자!

이 광인의 생각은 5·4기 문인들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중국 구사회가 "禮敎吃人" 하는 더없이 잔인한 사회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가서 그는 "어린 아이들을 구하자!(救救孩子)"라는 말을 함으로써 진화론의 학설에 따라 다음 세대에는 사람을 더 이상 잡아먹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줄곧 사회개혁을 생각해왔다. 장지동(張之洞)의 중체서용(中體西用)으로부터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의 변법 그리고 신해혁명과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사회개혁에의 이상을 계속 품어왔다. 특히 5·4운동은 민주와 과학을 구호로 내세워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구호를 제창한 사람들 자신이 이 두 가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했고 마치 이것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여 이것만 있으면 중국을 완전히 구원할 수 있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 그 기대는 번번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5·4기의 작가들 역시 이러한 이상을 향하여 나아갔고 작품 속에 이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즉 그들이 문이재도(文以載道) 하려문 "문(文)"에 "재(載)" 하는 것은 바로 중국을 구원하는 "길(道)"이었던 것이다. 노신은 비록 비관론자였지만 중국의 구사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중국인을 개조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일본에서 애초에 의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문학을 택하게 된 이유를 국민정신의 개조에 두었던 노신인 만큼 이점은 다른 작가들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광인일기> 마지막에서 다음 세대에 대해 기대를 걸어 본 것은 어느 면에선 본래의 주제에 곁들여 쓴 또다른 하나의 구호라 할 수 있어 순수한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군더더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구하자"는 것은 노신의 일관된 주장이며 일생의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사람을 잡아먹는 예교와 전통에 대해 절망한 후 그의 희망과 사랑을 미래의 새세대에게 기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인일기>를 "어린 아이들을 구하자"고 한 말로 끝맺은 것은 곁들여 쓴 구호라기보다는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통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발판이 될 수 있음도 동시에 말하고 있다.

 

☞ 풍자문학의 계승자

<광인일기>는 중국 신문학사상 최초의 백화소설이란 점에서 중국 전통의 백화문학사에 노신을 볼 것 같으면 그는 중국 풍자문학의 계승자로서 풍자문학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의 ≪유림외사(儒林外史)≫는 중국 풍자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구예교와 과거제도의 폐해를 폭로하고 사대부 계층의 부패한 사상과 타락된 도덕을 풍자하였다. 반면에 이 작품에는 남경의 몇몇 학자들과 같은 작자 심중의 영웅들도 등장하는 적극적인 일면을 엿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러 이러한 풍자문학의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작자 심중의 영웅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기에 노신이 그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견책소설(譴責小說)"이라고 명명하여 정통의 풍자소설과 구별했던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노잔유기(老殘遊記)≫≪얼해화(孼海花)≫ 등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풍자되고 있다. 전통 도덕의 표준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도 풍자되며, 효순(孝順)하는 사람과 효순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탐오(貪汚)하는 관리와 그렇지 않은 관리가 똑같이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 전통의 가치판단 기준이 흔들리고 중국문화의 위기가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화위기의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볼 수 있는 것이나 중국과 같이 역사가 오래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지녀왔던 나라에서 겪는 위기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위기를 가장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던 노신은 풍자문학의 장점을 그의 문필에 집중시켜 작품을 썼던 것이다.

(이 글은 학창시절에 ≪중국어세계≫라는 잡지에서 발췌해두었던 故 河正玉 교수님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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