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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전국문학예술가 대표대회에서 주양(周揚)이 발표한 내용은 형식적으로는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주근거지와 이후의 해방구에서 전개된 문예운동 실천이었지만, 실제로는 새로 건설된 국가의 문예사업에 대한 요구와 방침이었다. 연구자들의 지적대로 40년대 말기에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 일련의 문예사상 투쟁을 거친 후에 "해방구 문학을 대표로하는 좌익문학은 당대문학의 주요 구성 부분이 되었다." 모택동의 문예사상은 전쟁의 실천을 거치면서 성숙되었으며, 모택동의 문예사상을 지도 방침으로 한 항일민주근거지의 문예운동은 당시의 전쟁 실천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문학은 한 시기의 특수한 전쟁 임무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전쟁시기에 혁명을 위해 봉사한다는 창작 동기를 엄격히 준수했다. 이것은 작가들에게 개인(특히 소부르조아 지식인)의 주관적 정서를 극복하고, 전쟁의 주체적 역량(인민대중)을 묘사와 찬양, 홍보 교육의 대상으로 삼도록 요구하였다. 2. 전쟁은 승리의 쟁취가 목적이므로, 각종 문학 홍보자료는 찬양과 낙관, 전망을 주요 기조로 삼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비극적, 비관적, 퇴폐적 경향의 문예는 모두 배제되었다. 3. 전쟁의 주체는 교육수준이 높지 않은 무수한 농민들이므로, 문학적 표현 기법은 민간의 문예요소와 문예양식을 폭넓게 흡수하여,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형식으로써 문학의 홍보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로써 심미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민족화와 대중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4. 전쟁을 수행하면서 노동자 농민 출신의 지식인과 문예담당 간부를 직접 양성하여, 노동자 농민 군인 문예창작에 이로운 작가진영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1949년 이후 오랫동안 중국 문예담당 관계자들이 추구한 목표가 되었다. 해방구 출신의 문예 관계자는 "문학에서 혁명으로(從文學到革命)"와 "혁명에서 문학으로(從革命到文學)"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주로 30년대에 좌익문학운동을 하다가 항전 이후에 항일민주근거지로 가서 실무에 종사한 주양, 정령, 주립파(周立波), 소군(蕭軍), 애청(艾靑), 전간(田間), 구양산(歐陽山), 초명(草明) 등이며, 하기방(何其芳)과 같이 순수예술을 추구한 문학권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5.4" 신문학 전통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전쟁에 참가하여, 연안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 중에 사상비판과 자아투쟁을 거쳤는데, 그들 중에는 "소부르조아적 성향"을 극복하고 전쟁문화 규범 속에서 문예담당 간부가 된 사람도 있고, 자아투쟁이 철저하지 못하여 비판을 받거나 정치운동의 대상이 된 사람도 있었다. 후자는 항일전쟁 중에 성장한 문예 관계자들을 가리키며, 조수리(趙樹理), 유청(柳靑), 손리(孫犁), 마봉(馬烽), 이계(李季), 양빈(梁斌), 두붕정(杜鵬程), 오강(吳江), 하경지(賀敬之), 곽소천(郭小川) 등이 있다. 그들 중에는 학생 출신도 있고,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생활속에서 전통 민간문예를 학습하여 민간의 생활방식과 문화형태에 친숙한 사람도 있었다. 이 두 부류 작가들은 5∼60년대에 문학과 정치생활을 결부시켜 예술로써 시대적 주제를 표현하였다. 1949년에 시작된 중국 당대문학은 전쟁문화 규범 속에 있던 해방구 문학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것은 당연히 전쟁시기의 문학적 특징을 펼쳐보였으며, 이로써 문학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사업의 유기적인 구성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성격을 가진 중국의 소유제 개조와 사상의식 투쟁은 50년대 초부터 단계적으로 추진되면서 비교적 긴 역사적 시간 속에서 실천 경험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은 같은 시기에 발전한 당대문학이 예술로써 실험단계에 머물러있던 혁명운동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생활속에서 그 내용(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모든 경험 교훈)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견해를 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예술창작 규율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만약 빈곤하고 낙후된 중국의 낡은 면모를 일신시키려는 절박한 요구에서 나왔더라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중국에서의 사회주의제도의 시험과 실천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이러한 전대미문의 혁명운동을 기꺼이 찬양하였을 것이다. 만약 19세기에 사회주의가 공상에서 과학으로 옮겨지는 이론적 비약을 이룩했다고 한다면, 20세기에 그것은 이론의 운용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겨지는 인류의 거대한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지구상에는 구소련을 제외하고 그러한 실천에 성공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그 자체는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 탐색과 경험의 누적 과정이었으며, 무수한 반복 실천의 과정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역사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한 개인으로서, 그가 역사적 한계를 초월하여 완벽한 사회주의를 예술적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가의 창작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지도하는 국가의 단계별 정책 조문으로, 이것은 국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 생활속의 서민들, 특히 사회 하층에서 생활하는 군중들의 실상과 의식으로, 이것은 사물에 대한 민간의 가치 판단 기준이다. 해방구 출신의 작가들은 모두 의식적으로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고 전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오랜 혁명 실천 중에 인민대중과 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도 많았는데, 그들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예술적 추구를 민간문화에 융화시켰다가 창작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민간문화에 경도되어 민간의 진실한 소리를 표출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그 시기의 농촌사회주의운동에 관한 문학창작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이것은 50년대 문학창작의 주요 영역이 되었다. 농촌합작화운동 중에 중국공산당 중앙의 정책은 몇번이나 뒤바뀌었다. 1955년에 모택동은 전국의 성, 시, 자치구 당위원회서기회의에서 <농업합작화 문제에 관하여(關于農業合作化問題)>라는 문건을 발표하여, 농촌 공작부 부장 등자회(鄧子恢)의 실책을 비판하면서, 1953년과 1955년 봄에 중앙에서 시행했던 합작사에 대한 두 차례 정리작업을 부정하고 융통성 없는 "우경사상"을 크게 반박하였다. 계속하여 소집된 중국공산당 7기 6중전회에서는 합작화 속도 문제에 대한 이견들을 우경기회주의라 비판하였다. 이러한 정치사상 노선은 그후에 있었던 좌경모험주의적 오류의 발전, 과대한 계급투쟁과 노선투쟁, 문화대혁명의 발생과 내부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979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은 농촌 신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민공사제도를 폐지하고 전면 청부제(聯産承包責任制)를 시행하여 중국농민들을 또 다시 새로운 시험대에 올려 놓았다. 농업합작화운동의 역사적 과정과 그후 20여년에 걸친 실천 경험을 돌아보면, 작가를 포함하여 50년대 "고조" 시기의 사람들은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0년대 이후에는 농촌경제의 실패 교훈을 총결하고 새로운 경제정책을 칭송한 문학작품들이 대거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5∼60년대에 발표된 작품들은 거의 모두 농촌의 사회주의 개조를 옹호하는 국가의 의지를 시대적 주제로 삼고 국가의 최신 정책 조문을 제재로 하였다. 작가들은 그것이 수천년간 지속된 사유제를 벗어던진 위대한 혁명이라고만 인정하고, 그러한 역사적 변혁이 농민에게 가져다준 폐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에 농촌합작화운동을 제재로 한 작품들은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있는가? 당연히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러한 작품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역사적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먼저 민간문화 형태라는 하나의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5.4" 이래로 중국의 신문학은 향토를 제재로 한 작품들이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두면서 보편적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국민성을 탐구하고 개혁하는 계몽주의와 원시 민간 자연을 숭상하는 전원 낭만주의의 양대 유파로 집중되었다. 40년대에 흥기한 전쟁문화 규범은 "5.4" 이래의 각종 제재에 대한 창작을 거의 중단하고, 농촌 향토 제재에 대한 창작만 계승하였다. 5∼60년대 농촌 제재 소설에서 소조된 비교적 성공적인 농민 형상은 시대적 이미지를 강하게 새겨놓았만, 정신상에서는 윤토(閏土), 아큐(阿Q), 노통보(老通寶), 취취(翠翠) 등의 전형적인 관념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그 시대의 인물이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새로운 현실 환경 속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하는데, 주립파의 ≪산촌의 대변혁(山鄕巨變)≫에 등장하는 성우정(盛佑亭), 왕국생(王菊生), 성숙군(盛淑君)과 유청(柳靑)의 ≪창업사(創業史)≫에 등장하는 양삼로한(王三老漢), 왕이직강(王二直강), 곽진산(郭振山) 등이 그러하다. "민간"은 풍부한 의미를 가진 문화의 한 개념이다. 향토문학 전통 속에서 그것은 자유스런 농촌사회 및 그 문화 관념과 융합되어, 사회 최하층에서 몸부림치는 많은 농민들의 의식과 생활상을 진실하게 묘사하였다. "5.4"시대의 작가들은 이러한 "민간"세계에 대하여 아주 복잡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진지한 관심과 특수한 감정은 새로운 시대의 작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우리는 농민의 전통적인 사유관념에 대한 유청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하여, 노신이 무엇 때문에 근로대중들에게 수천년간의 정신적 부담을 자아투쟁으로 극복하고 새생명과 희망을 추구할 것을 그토록 통절하게 외쳤는지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호남의 산촌 풍경과 아름다운 인성에 대한 주립파의 진심어린 찬미를 통하여, 심종문이 무엇 때문에 "민간"의 원시성과 소박함, 건전함을 그토록 친밀한 감정으로 노래했는지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민간문화는 당대문학사상 특정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 하층(민간사회)에서 생활하는 근로대중의 자유로운 감정과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민간문화 특유의 심미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전쟁문화에 의해 특징이 결정되어지는 문학은 민족화와 대중화를 중시하면서 자유로운 상태의 민간문화를 민족화와 대중화의 구성 요소로 삼고, 그것을 적절하게 흡수하거나 비판적으로 이용하여 천천히 당대문학의 창작에 운용해야 하고, 또한 그 속에서 너무 강경한 정치선전 성분을 용해하고 중화시켜야 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항상 정치선전과 예술창작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민간문화 요소는 언제나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중편소설 ≪삼리만(三里灣)≫(조수리 작), ≪철목전전(鐵木前傳)≫(손리 작), ≪귀가(歸家)≫(劉澍德 작), ≪흑봉(黑鳳)≫(王汶石 작), 단편소설 ≪뇌 아주머니(賴大嫂)≫(西戎 작), ≪단련단련(鍛煉鍛煉)≫(조수리 작), ≪산 저편의 인가(山那邊人家)≫(주립파 작), 희극 ≪뻐꾸기는 다시 울었다(布谷鳥又叫了)≫(楊履方 편극), ≪퉁소횡취(洞簫橫吹)≫(海默 편극), 영화 ≪이쌍쌍(李雙雙)≫(李準 편극), ≪우리 마을 젊은이(我們村里的年輕人)≫(馬烽 편극), ≪다섯 송이 금화(五타金花)≫(季康, 公浦 편극) 등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비록 창작 배경상에서 강렬한 시대적 주제를 가지고 있고, 내용 구성과 인물 소조도 명확한 정치 선전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들은 농촌생활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정감을 바탕으로, 문학창작에 민간문예의 예술적 매력을 다양하게 반영해냄으로써 작품에 감동과 생기가 충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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