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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에 소집된 제1차 전국문학예술가 대표대회에서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중국공산당 중앙을 대표하여 정치 보고를 하면서, "제1차
대혁명의 실패 이래로 점차 두 개 지구로 분리되었던 문예 관계자들이
오늘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이 "두 개 지구"는 바로 해방구와
국통구(국민당통치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개 지구에서 온
문예 관계자들을 높게 평가하면서, "해방구에서는
많은 문예 관계자들이 군대와 농촌으로, 최근에는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노동자, 농민, 군인 대중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일차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전의
국민당통치구에서는 혁명적인 문예 관계자들이 자신의 직분을 지키면서
적들의 압박속에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5.4 이래의 혁명적
문예 전통을 유지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회에서 주양(周揚)과 모순(茅盾)도 두 개 지구의 문예운동 경험을
총괄하는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두 보고자의 발표 원고와 발언 태도를
비교해보면 흥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주양은 원고를 낭독하기
시작하자마자 단호한 어조로 선포하였다.
"모택동
주석의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담화>에서는 신중국의 문예의
방향을 규정하였습니다. 해방구의 문예 관계자들은 자각적으로 꿋꿋이
이 방향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경험으로써 이 방향이
완전히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향이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잘못된 방향일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따라서 그는 해방구 문예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미래의 신중국
문예의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순도 투쟁 경험을 총괄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더욱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국통구 혁명문예운동의 여러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특히 이론과 창작 방면에서 항전시기에 "5.4"
신문학 전통을 수호한 호풍과 호풍의 주변에 모여있는 진보적 작가들을
비평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문예 발전에 있어서 두 개 지구와 두 종류
전통의 경중 관계를 명확하게 밝혔다. 이 대회에 참가한 대표자들은
엄격한 선발을 거친 "인민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人民需要的人: 모택동의 말임)"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이 대회에 참석한 것 자체가 바로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5.4" 신문학 발전 중에 중요한 공헌을 한 많은 문학가들이
이 자리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변성(邊城)≫을 창작한
유명한 작가 심종문(沈從文), ≪문학잡지(文學雜志)≫를 책임 편집한
유명한 미학가 주광잠(朱光潛), 점령지에서 명망이 높았던 여류작가
장애령(張愛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1차
전국문학예술가 대표대회는 하나의 상징으로,
앞으로 개막될 중국문학의 새로운 단계가 해방구의 전쟁 실천에서 나온
문예 전통을 기반으로 삼고, 동시에 사상투쟁과 사상개조를 기초로 "5.4"
혁명문예 전통의 투쟁 역량을 조건적으로 흡수할 것임을 예고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문예 진영의 통합 작업은 일찍이 1948년부터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해 중국공산당 소속의 홍콩 문화공작위원회에서 펴낸
문학이론 잡지 ≪대중문예총간(大衆文藝叢刊)≫에서는 문단의 각종 경향에
대하여 호전적으로 비판하였다. 즉, 곽말약(郭沫若)은 <반동적인
문예를 배척한다(斥反動文藝)>는 글에서 심종문, 주광잠, 소건(蕭乾)
등 "부르조아" 작가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소전린(邵 麟),
호승(胡繩), 교목(喬木: 喬冠華) 등은 좌익 진영인 호풍의 문예이론과
노령(路翎)의 소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성토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
소속의 홍콩의 다른 진보적인 간행물들도 일제히 호응하여 국통구에서
비교적 영향력 있던 작가들에 대하여 비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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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제1차 문대회"에 참석한 모택동,
주양, 모순, 곽말약(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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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비평을 받은 작가는 요설은(姚雪垠), 낙빈기(駱賓基), 전종서(錢種書),
장극가(臧克家), 이광전(李廣田) 등으로 그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해방구 문예창작에 대하여 열정적인 소개와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후세의 문학사가들은 1948년의
이러한 비판과 "재평가" 운동이 바로 "문학사에 대한
평가를 준비하면서 논쟁(쟁취)해야 하는 것은 문학사(및 현실문단)에서의
주도적인 위치였다."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제1차 전국문학예술가
대표대회는 이러한 비판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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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전국문학예술가 대표대회는 새정권이 영도하는 문예 진영의 수립을 의미하지만,
결코 진영 내부에 잔존하는 사상투쟁의 종결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당대문학의
양대 전통은 그 위치가 분명히 가려졌지만, 그속에 남아있는 가치관,
교육관, 문화관에서의 심각한 대립은 정치운동의 형식을 통하여 거듭
표출되었다. 50년대 초기의 문학사는 일련의 비평과 자아비평으로 구성되었다.
1954년과 1955년에 모택동은 직접 고전문학 연구가 유평백(兪平伯)의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에 대한 비판과 문학이론가 호풍과 그
"일당"에 대한 진압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이러한
대립의 극치였다고 할 수 있다. 유평백은 평생에 걸쳐 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여 학술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이것은 누구도 말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학술 성과가 전국적 비판운동의 전형으로
지목된 까닭은 그의 학술 연구 방법이 주로 "5.4" 신문학
창시자의 한 사람인 호적(胡適)의 학술 전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40년대
말에 호적은 대륙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는 대륙에 남아있던
현대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나타났고, 학술연구의 사유방법상에서는 더욱 많이
나타났다. 호적은 평생 실용주의 사상을 강조하였으며, 실험과 증거를
중시하고 미신과 맹종을 반대하였다. 30년대에 호적은 일찍이 이러한
사유방법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수용의 중단을 충고한 바
있다. 50년대에는 전쟁 문화 정서가 지배적인 특정 혁명역사 시기에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낡은 세계관을 포기하고, 전쟁시기에
가지고 있던 거대한 열정을 새로운 생활의 창조로 발산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모택동은 이러한 사유방법을 부정적인 걸림돌이라 판단하고 유평백을
체포하여 표적으로 삼았는데, 그 목적은 "고전문학 영역에서 청년들에게
30여년간 해를 끼친 호적파 부르조아 유심론의 반대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과연 유평백의 <홍루몽연구>에 대한 비판이 있고 얼마되지
않아 운동은 사회과학 영역에서 호적의 유심론을 비판하는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그것은 계속하여 다시 대규모의 지식인 사상개조
운동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호풍은 30년대 좌익문예운동 중에 태어난
좌익 문학이론가였다. 그는 세계 혁명문예이론과 그 실천 경험을 항전
이래의 "5.4" 신문예 투쟁 전통과 결부시켜 독자적인 문예사상
체계를 확립하였다. 노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노신이 창시한 현실
투쟁정신의 실천 노선을 자각적으로 계승하여 현실주의 이론으로써 문예창작을
이끌었다. 그는 ≪칠월(七月)≫, ≪희망(希望)≫ 등의 편집을 통하여
혁명을 동경하는 문학청년들을 결속시키면서 항전 문학운동 중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호풍의 문학실천은 모두 지식인의 계몽 입장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지식인들에게 "5.4"의 투쟁 전통을
가지고 항전에 돌입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중과 접촉하면서 대중의
사유방식과 감정방식, 생활 인식방식을 학습하고, 그것을 통하여 대중이
항전에 참가하여 자신을 점점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잘 인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대중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적 노예화 상처"에
대해서도 단호히 비판하였다. "5.4" 계몽 전통의 특징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상은, 지식인이 자각적으로 사상감정을 개조하여
무조건 노동자 농민 군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정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모택동의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담화>의 사상과는 실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40년대에는 해방구와 국통구의 생활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50년대에 모택동의
문예사상이 전국문예의 방침이 되었을 때 이러한 차이는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호풍 자신은 주관적으로 이러한 차이의 심각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해방구 출신의 이론가들이 모택동의
문예사상을 해석하면서 범한 이론적 오류로 여기고, 모택동에게 자신의
이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하기방(何其芳)과
임묵함(林默涵) 등의 그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장 30만자에 달하는 호풍의 <해방 이래의 문예 실천 상황에
관한 보고(關于解放以來的文藝實踐情況的報告)>이다. 이 일로 그는
신임을 잃고 갈등을 풀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냉혹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이 일은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호풍과
그의 동료들은 "반혁명집단"이라는 죄명을 쓴 채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호풍사상의
비판과 호풍집단의 진압을 거치면서 "5.4" 신문학 전통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모택동에
의해 자신의 문예사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모택동 자신의
언어방식을 통하여 표달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요소는 모두 잠재적인
상태에서 간간이 작가의 창작실천과 결부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1956년의 "쌍백방침" 시기에 생활의 진실된 묘사와 인성론을
제창한 문예 현상 속에서, "5.4" 전통은 어느 정도 부활되어
문학창작면에서 "5.4" 전통은 간헐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5.4" 신문학 전통 속에서 성장한 작가들은 새시대를
맞이한 감정이 매우 복잡하였다.
30여년간
문예노선과 정치투쟁이 복잡하게 맞물려 옴으로써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방법으로 새시대와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해외로 망명한 작가들은
제외하고 대륙에 남아서 새정권을 맞이한 작가에 대해서만 말하더라도
그들의 내심 세계는 각양각색이었다. 마음껏 환호하는 사람, 신중히
살피는 사람, 놀라서 당황하는 사람, 이름을 감추고 숨는 사람, ……
그 시기의 문학창작 속에서 우리는 대체로 단순한 혁명시대에도 지식인의
심리 세계는 오히려 단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의 작가는 주로 좌익문학 진영 출신이거나
오랫동안 공산당과 공동으로 정치투쟁을 전개한 진보적 민주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새정권의 수립에 영광스런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승리자의 희열이 그들의 정서를 크게 지배하였다. 비록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번뇌를 만나기도 하였지만, 역사적으로나
국민적 입장에서 그들은 승리를 함께 나누는 기쁨을 진정으로 맛보았다.
이에 비해 해방구 출신의 작가들은 연안정풍(延安整風) 교육을 거쳐
혁명의 실천 속에서 새정권을 이해하였다. 지식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혁명의 권리 외에도 자신의 낡은 세계관을 고통스럽게 개조할 의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좌익문예운동의 시작 때부터 줄곧
자기혁명적인 태도로써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을 격려하였다.
따라서 이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새정권을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이상의 실현으로 간주하고 소리 높여 새정권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호풍의
장시 <시간은 시작되었다(時間開始了)>는 바로 이 시대의 대표작이다.
두
번째 부류의 작가는 정치투쟁에서 벗어난 많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기나긴 문학생활 속에서 독립적인 이상의 추구를
견지하고 국민당 통치하의 사회현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의 대변혁에 대하여 희망을 품긴 하였지만, 새정권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5.4" 전통 속에서
성장한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시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호간의
이해를 통하여 새로운 계약 관계가 설정될 수 있기를 바랬다. "5.4"
시대의 중요한 작가들 중에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노사(老舍)는 처음에 해외에서 귀국하였을 때 "미국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고, 파금(巴金)은 초기에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신봉하였으나, 제1차 문학예술가 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발언할
때는,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보크만이 "10월혁명" 후에 귀국하여
소비에트 건설에 참가하였을 때 강연한 <나는 배우러 왔다>의
제목을 원용하였다.
세
번째 부류의 작가는 일찍이 직간접적으로 공산당이나
좌익운동과의 마찰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마찰은 없었더라도
계층간의 사회적 장벽으로 새정권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중요한 시기에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을 씻어버리고 새정권과
다시 좋은 관계를 설정할 수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새시대에 직면하여
그들은 마음속으로 대단히 긴장하였다.
심종문은
이 부류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시에 거대한
시대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는 실성하여 미친사람처럼 헛소리를
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그가 쓴 글들은 모두
발표되지 못하고 잠재적인 형태의 창작으로 남아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시대의 정신을 진실되게 표현한 소중한 기록이 되고 있다. 그후 심종문은
결국 문학을 포기하고 역사문물 연구로 전향하여 새로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작가들은 대부분 스스로 문단을 떠나 민간에 은거하였으며, 그들
중에는 잠재적인 상태에서 많은 창작을 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복녕(卜寧, 필명은 무명씨)은 은거상태에서 200만자에 이르는 거작 ≪무명서(無名書)≫를
완성하였다.
작가와
시대의 관계는 복잡하다. 작가의 주관적인 태도와 경향은 단지 문학창작의
어떤 한 방면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사상 감정에서 심미 언어에
이르기까지 "5.4" 신문학 전통의 표현형식으로는 새로운 환경과
혁명 공리주의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극히 개별적인
작가들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역사를 제재로 한 작품처럼) 비교적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지만, 그외에 대부분의 국통구 출신 작가들은
그들의 창작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의 서정은 공허하고
무력한 것으로 변하였고, 그들의 창작도 시사를 도해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창작은 양적으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예술적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였던 파금,
조우(曹우), 엽성도(葉聖陶), 풍지(馮至), 장극가(臧克家)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좌익문예운동 중에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모순, 애청(艾靑),
정령(丁玲), 하연(夏衍), 사정(沙汀), 애무(艾蕪), 전간(田間) 등도
이전의 자신의 문학적 성취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써내지 못하였다. 이것은
개인의 창작능력이 쇠진하였다기 보다는 전쟁 문화 정서가 지배적인
당대의 문화 규범에 그들의 정신노동이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5.4" 정신의 성과를 진정으로 구현한 것은
오히려 당시에 발표되지 못했던, 발표할 의사도 없었던 많은 잠재적인
창작들이다. 예를 들면, 창작권을 박탈당한 "칠월파(七月派)와
"중국신시파(中國新詩派)" 시인들의 창작과 무명씨의 장편소설
≪무명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들은 오히려
그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문학창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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