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그는 많은 단편소설로써 구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 동시에, 하층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동정하고 소자산계급 지식인들의 평범하고 소극적인 생활을 조소했다. ≪씀바귀(苦菜)≫와
≪새벽길(曉行)≫에서는 지주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는 농민을 묘사했고, ≪일생(一生)≫,
≪아봉(阿鳳)≫, ≪소동장(小銅匠)≫에서는 구사회에서 모욕과 압박으로 고통에 허덕이는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짐승 같은 생활을 묘사하여 그들의 비참한 현실에 깊은 동정을
표했다.
엽소균의
초기 작품은 오랜 교직생활을 통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학교 교사와 소시민들의
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밥(飯)≫, ≪전도(前途)≫, ≪교장(校長)≫ 등에서는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모욕을 참으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오(吳)선생, 군벌의 혼전으로
오랫동안 봉급도 받지 못한 채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교사 혜지(惠之), 교육에
대한 이상과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구세력에 대항하지 못하는 초등학교 교장
숙아(叔雅) 등을 그리고 있다.
작자는 이러한 인물들의 성격을 구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세력에 핍박받는 그들의 어려운 환경에 동정하면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그들의 주장에 찬동을 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과장되고 타협적인 그들의 사상적
결함을 비판하면서 구사회와 교육계의 부패를 폭로하였다.
1924년에
발표된 ≪어려움에 처한 반선생(潘先生在難中)≫은 이러한 내용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반선생은 상해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의 초등학교 교장이다.
그는 군벌이 혼전을 거듭하는 와중에서 재난을 피하기 위해 교장이란 직위를 이용하여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정세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으면 곧바로 조계지로
도피하고, 전쟁이 심해지면 자진해서 회비를 내고 홍십자회(紅十字會) 회원이 된다. 그는
홍십자회의 깃발과 휘장을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외국인의 도움을 구한다. 그러나 전쟁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군벌의 개선을 환영하며 돌아올 때에 그는 오히려 환영을 의미하는
현판을 내걸고 군벌의 송덕을 노래한다. 엽소균은 이 작품 속에서 반선생의 사욕과 비겁하고
안일한 성격을 부각시켰다. 엽소균이 반선생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한 것은
당시에 중대한 교육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엽소균의
초기 작품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사실주의 수법으로 구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폭로하고,
교육계의 추악한 행위와 소자산계급의 사상적 결함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아름다움"과 "사랑"만으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악의
근원을 깊이 탐색하지 못하고 정확한 출로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초기 작품에는
대체로 혁명적 열정이 부족한 반면 처량하고 우울한 정서가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1925년
5월 30일 상해에서 발생한 "5.30참사"로 인한 피의 교훈은 엽소균의 창작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했다. 즉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비판 능력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강건하고
투쟁적인 성격의 인물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1926년
말에 발표한 ≪항쟁(抗爭)≫에서는 주인공 곽(郭)선생이 교육과 생활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구세력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교육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단체를 결성하여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주도로 열린 교직원연합회 임시대회에서는
봉급의 정상적인 지급과 교육개혁을 요구하고,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동맹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동맹파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곽선생도 해직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성중(城中)≫
속의 정양생(丁兩生)도 신사조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로서 새로운 교육으로 구사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1927년
11월에 발표한 ≪밤(夜)≫에서는 당시 사회의 주된 모순과 투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밤≫에서는 대혁명이 실패한 후 국민당이 공산당원들을 마구 도살하는 죄상을
폭로하고, 딸과 사위를 동시에 잃어버린 공포의 밤에 일어나는 노부인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딸과 사위의 죽음을 들은 노부인은 처음에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그저 망망함만 느꼈으나, 나중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면서 딸과 사위를 위해 복수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딸과 사위의 유서를 본 후 그들의 뜻을 명백히 파악하고는 어머니로서
책임을 용감하게 짊어지기로 결심한다. ≪밤≫속에 퍼져있는 분위기는 처참하지만 결코
소극적이거나 침울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1928년
≪교육잡지≫에 연재된 장편소설 ≪예환지≫는 초등학교 교사 예환지의 일생을 통하여
5.4운동이래 1927년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항쟁에서 대중운동으로 참가하게 되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변천을 반영하고 있다.
예환지는
삶에 대한 이상과 혁명적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교육사업에 모든 희망을 걸고 투신하였다.
그는 교장 장빙여(蔣氷如)와 함께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에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학교에 농장과 공장, 상점 등을 만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여 민족의 위기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교육적 실천이 실패하자
그의 새로운 가정생활과 애정에 대한 추구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아내 김패장은 결혼
전에 높은 이상을 가지고 여성해방을 갈구했지만, 결혼 후에는 잡다한 집안일에 매달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변했다. 그녀는 임신을 한 후 교육계를 떠났고, 그러면서 교육과 국가대사에
대해서도 점점 흥미를 잃는 등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김패장의 이러한
변화는 아무리 신교육을 받은 여성일지라도 당시와 같은 봉건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결코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로 설명할 수 있다.
5.4운동은
예환지의 애국적 열정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 대중들을 향하여 일치단결하여
제국주의에 대항하자고 외쳤다. 그는 사회와 정치를 떠난 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장빙여에게, "우리가 이전에 한 행동은 그르다. 오직 학교측만 생각하고 다른
책임은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예환지의 사상이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환지는
어린시절 동창이자 혁명가인 왕락산을 만난 후 교육구국론의 오류를 깨달았다. 즉 사회의
개혁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자는 예환지의 개인적 투쟁과 개량주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후 예환지는 그 마을을 떠나 상해로 갔으며, 5.30운동은 예환지를 더욱 고무시켰다.
이때 그는 무산계급의 역량을 인식하고 노동자를 배우기 위해 바로 노동자들 속으로 투신했다.
그는 자기가 한 마리의 물고기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그들의 바닷물 가운데 침몰해 있었다.
그는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흥분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12쿠데타로 혁명군중에 대한 무차별한 대학살을 목도한 나약한 한 지식인은
공포와 증오를 느꼈지만, 다시 비애와 절망에 빠져 1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술집을
드나들며 술로 슬픔을 삭이면서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는 장염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죽음에 임박하여 침통하게 말했다.
"유약한
힘, 들뜬 감정, 결국 쓸모가 없었다. 완전히…!… 성공, 그것은 우리가 받을 상품이 아니라
장래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움켜쥘 것이다. 그들에게 받아가게 해!"
임종시의
이러한 자백은 그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예환지는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한 청년이다. 그의 일생이 비록 우여곡절을
겪고 있으나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점차 발전하고 있다. 5.4운동에서 대혁명에 이르는
시기에 예환지와 같은 인물은 적지 않았다.
≪예환지≫는
대혁명 실패 후에 발표되었다. 이때 국민당의 공산당원 탄압이 거세게 몰아쳐 혁명은
극히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이로써 많은 지식인들은 비관과 절망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예환지≫에서는 이러한 지식인의 이러한 소극적인 정서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대중혁명의 투쟁을 찬양하면서 혁명의 미래와 희망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엽소균의 사상적 한계로 인하여 ≪예환지≫에도 조그만 결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작품에서 혁명가 왕락산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나 그의 사상이나 신앙 활동이 모두 모호하여
그가 혁명운동 속에서 조직을 이끄는 힘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둘째,
예환지가 상해에 간 후의 활동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셋째,
예환지의 아내 김패장은 줄곧 퇴폐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갑자기 큰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 변화 과정에 대해 믿을만한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로 보아 ≪예환지≫의 구성은 다소 용두사미의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소설의 전반부는
인물묘사가 풍부하고 뛰어나지만 후반부는 거기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예환지≫는 여전히 농푸한 시대적 의의를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환지≫
이후 작자는 30년대에 ≪풍작을 거둔 뒤≫, ≪선언≫ 등 비교적 좋은 단편소설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삼집(四三集)≫에 수록되어 있다. 엽소균의 소설은
언어가 소박 간결하면서 매우 생동감 있다. 수식적인 단어나 서양식의 구절이 없고 방언의
사용도 자제하고 있다. 그는 "1절을 쓰고 나면 서너 차례 통독한다. 어떤 때는 몇 개의
단어나 한 두 구절을 증감하기 위해서 10여번이나 읽기도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서 엽소균이 언어의 선택과 퇴고에 상당히 고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표현기법상에서
작자는 인물의 심리활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항상 필봉을 인물의 영혼 깊은 곳까지
갖다대어 복잡하고 세밀한 심리상태를 생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사상과 감정을
말끔히 표현해내고 있다. 이밖에 풍경묘사 역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여 정경(情景)이
서로 융합되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작품의 구성도 매우 엄격하고 치밀하다.
엽소균의
산문은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매우 진실하며 산뜻하다. 1925년 발표한 <5월 31일
소나무 속에서>는 인구에 회자되는 우수한 산문이다. 작자는 제국주의가 중국인민들을
마구 도살하는 것에 분노하여 고발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연히 나아가는 애국적
군중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노래했으며, 희망을 노동자들에게 기탁하여 강렬한 혁명적
애증을 표현했다.
엽소균은
매우 영향력 있는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소백선(小白船)>, <방아의 꿈(芳兒...)>
등에서는 꿈속 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생의 고통을 수차례
맛보고 난 후에는 ≪허수아비≫와 ≪고대 영웅의 석상≫ 등 처량하고 비참한 곡조를 띤
철학적 인생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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