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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현 대 문 학

욱달부와 그의 소설

 

 

욱달부(郁達夫, 1896∼1945)는 본명이 욱문(郁文)이고 자가 달부(達夫)이며 절강성 부양(富陽) 출신이다. 그는 창조사(創造社)의 주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며 5.4 이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1903년 욱달부는 7세때부터 5년간 사숙에서 계몽교육을 받고, 1908년 12세때 부양현 유일의 "양학당(洋學堂)인 현립 고등소학당에 입학하였다. 1910년 겨울 욱달부는 이 고등소학당에서 3년만에 4년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1911년 그는 가흥(嘉興)으로 가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중국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을 충분히 닦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구체시(舊體詩)를 지어 신문잡지사에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그는 항주로 가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가 운영하는 지강대학(之江大學) 예과(預科)에 입학하였으나,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학교장 탄압에 항의하는 학생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학교측으로부터 퇴학을 당했다. 1913년 봄 그는 미국 침례교회에서 운영하는 혜란중학(惠蘭中學)에 편입하였으나, 3개월 후에 다시 학교의 엄격한 규칙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1913년 가을 그는 형 욱화(郁華)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제1고등학교, 나고야 제8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외국문학과 철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약소국민으로서 이국생활의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 애국적인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나의 서정시대는 방탕하고 참혹하게 군벌 독재의 섬나라에서 보냈다. 눈으로는 고국의 격침을 보고 몸으로는 타향살이의 굴욕을 받았다. 느끼고 생각하며 겪은 모두 골라내어 보면 실망스럽지 않은 것이 없고 가슴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술회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우울의 정서하에서 그는 러시아와 서구의 문학작품을 대량 열독하면서 경제학에서 문학창작으로 자신의 진로를 바꾸었다.

1921년에 그는 창조사(創造社) 설립에 동참하면서 신문학사상 최초의 백화단편소설집인 ≪침륜(沈淪)≫을 발표하여 "놀라운 제재 선택과 대담한 묘사"로써 문단을 떠들석하게 했다. 계속하여 그는 ≪남천(南遷)≫, ≪은회색의 죽음(銀灰色的死)≫, ≪위장병(胃病)≫, ≪향수병자(懷鄕病者)≫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주로 청년의 변태심리와 애정고민 묘사를 통하여 어두운 현실에 대한 무력감으로 생겨난 지식인의 격분과 낙심을 복잡하게 나타낸 것이다. 이들 작품은 발표된 후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도학자들은 욱달부의 작품이 "패륜 패덕을 설교하는 것"이며 "부도덕한 문학"이라 비난하고, 그가 "자신의 몸에 고의로 피고름이 썩은 상처를 내어 길가는 사람의 동정을 끌어들인다"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당시 현실에 불만을 품고 고민 방황하던 청년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침륜≫은 욱달부의 초기 대표작으로 자서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일본에 있는 중국 유학생이 이민족의 차별과 냉대를 받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고독에 빠진 것을 묘사하였다. 이 인물의 정신세계 속에는 국가와 개인의 고난이 혼연일체 되어 그의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다. 조국의 빈곤과 쇠약함은 그에게 항상 모욕과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약소국민의 억울함과 미천함을 느끼도록 하였다. 그는 조국이 빨리 부강해져 현 상황을 변화시키기를 바랬다. 그러나 정치상에 더 이상 출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애정의 추구와 성욕의 자극으로부터 위안을 받고자 하였다.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자 그는 결국 절망을 안고 세상을 버린 채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이 작품으로부터 우리는 작자의 애국적인 열정과 제국주의, 반봉건주의에 대한 불만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대담한 자아분석을 통하여 구제도와 봉건도덕에 대한 풍자와 반항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자살이란 만성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소극적인 일면을 남겼다. 이 작품은 농후한 감상(感傷)과 퇴폐적인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독자들에게 다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922년 욱달부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서 ≪창조(創造)≫계간과 ≪창조주보(創造周報)≫ 등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중국공산당이 창설되어 노동자계급이 정치 무대로 올라갔고 사회주의 사상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했던 욱달부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사상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1923년부터 북경대학, 무창사범대학(武昌師範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3년 5월, 그는 <문학상의 계급투쟁(文學上的階級鬪爭)>이란 문장을 발표하여, "세계에 고통받는 무산계급자여! 문학적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동지여! 유권 유산계급의 앞잡이에 대항하는 문인이여! 우리 모두 단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힘차게 외쳤다. 이 시기에 발표된 욱달부의 작품으로는 감상적인 정조가 흐르는 ≪망망야(茫茫夜)≫와 ≪추류(秋柳)≫ 외에도 노동인민을 제재로 삼은 ≪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春風沈醉的晩上)≫과 ≪박전(薄奠)≫이 있다.

 1923년 7월에 ≪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을 발표하면서 그의 작품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즉, 이전의 자아 폭로적인 신별소설에서 소시민의 고통과 하층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등 사회고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은 선량하고 순박하며 진실한 여성 노동자의 형상을 묘사하였다. 담배공장 여공 진이매(陳二妹)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본가를 위하여 일하면서 잔업까지 할 때도 있지만, 곤궁한 생활과 모욕적인 운명을 시종 면할 길이 없었다. 즉, 공장측에서는 임금을 백방으로 떼어먹고 관리인은 매일 그녀를 희롱하려 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착취계급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특히 자기가 근무하는 그 공장의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와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하였다. 예를 들면, 오갈 데 없는 실업자에 대하여 소설 속의 "나"는 깊은 동정심을 느끼면서 격려하고 도와준다. 후에 그녀가 이 "나"와 도둑놈이 한데 뒤섞여 있다고 오해하고 의심했을 때에 그에게 간곡한 충고를 하며 진실한 관심과 사랑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생동감 있는 묘사로부터 우리는 순박하고 고상한 여공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박전≫에서는 인력거꾼의 곤궁한 생활과 비참한 죽음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모든 어두운 사회에 대하여 강렬하게 고소하고 저주하였다.

이 두 편의 소설은 욱달부의 소설창작 경향의 중요한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노동인민의 고귀한 품성과 고난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표현하여 사회적 갈등 문제에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욱달부의 창작 중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선명한 애증, 강렬한 사상성, 완전한 구성, 아름다운 언어, 서정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자는 소설에서 제1인칭 수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자의 사상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작품에 표현된 노동인민에 대한 동정은 단지 방관자의 연민일 뿐이고, 어조도 비교적 낮게 가라앉아 있다.

욱달부는 소자산계급의 입장을 바꾸지 못함으로써 군중의 역량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갈등과 고민 속에 처해 있었다.

1926년 그는 열렬한 희망을 품고 대혁명의 발원지인 광주(廣州)에 갔지만 좌절에 부딪혀 실망하고 돌아온다. 창조사가 혁명으로 전환하여 곽말약(郭沫若), 성방오(成방吾) 등이 모두 혁명투쟁에 적극 가담하였을 때, 1927년 8월에 그는 창조사를 떠났다. 1928년 노신(魯迅)과 함께 ≪분류(奔流)≫월간을 공동 편집하고 ≪대중문예(大衆文藝)≫를 책임 편집하였다. 1930년 중국자유운동대동맹(中國自由運動大同盟)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중국좌익작가연맹에도 참가하였다.

1933년 초에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運動)에 가입하였으며, 국민당의 백색테러 통치가 날로 심해져 많은 혁명작가들이 피살되고 혁명조직이 파괴되었을 때에 그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가 그후에 결국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이 가장 침체되어 그때 쓰여진 소설과 유기소품(游記小品)들은 모두 은일, 산림, 세상에 대한 무관심, 낙천적인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경향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소설은 ≪지계화(遲桂花)≫와 ≪동재관(東梓關)≫이다.

≪지계화≫에서는 사랑의 충격을 받은 유학생 옹즉생(翁則生)이 항주의 서호(西湖)에서 다년간 요양한 후 마침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산림에 은거하여 자신이 처한 환경에 안착하는 은사(隱士)가 된다는 것을 묘사하였다.

≪동재관≫에서 작자가 찬양한 것은 봉건 사대부의 명의(名醫) 같은 유유자적한 생활이었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대체로 소극적이었으나 초기 창작에서 보여준 퇴폐적인 사상에 비하면 새로운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주의자였기에, 결국은 격동의 현실세계로 돌아와 많은 정론(政論)을 발표하여 사람들에게 조국수호 전투에 적극 참가할 것을 고무 격려하였다.

1935년에 쓴 ≪출분(出奔)≫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것은 혁명을 배경으로 경이적인 계급투쟁을 묘사하였다. 여기에서 작자는 지주인 동옥림(董玉林) 일가의 음흉하고 탐욕스런 본성을 자세하게 그려내었다. 특히 그들이 혁명대열의 내부로 침투하여 혁명을 파괴하는 비열한 수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소설 속의 전시영(錢時英)은 지식인 출신의 혁명 청년간부이다. 처음에 그는 동옥림에게 매수되어 혁명의 입장을 상실하고 지주인 동옥림을 옹호하지만, 나중에는 절실한 고통을 체험하면서 지주의 악독함 대하여 어느 정도 인식을 하게 된다. 작자는 이 연약한 지식인의 동요성을 비판하고 그의 최후의 각성을 긍정하였다.

 

욱달부와 두번째 아내 왕영하(王映霞)

한편 욱달부는 왕영하(王映霞)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1927년 본처인 손영(孫瑩)과 별거하고 왕영하와 결혼하여 항주에 풍우려(風雨廬)를 짓고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결국 파탄으로 끝나고, 왕영하는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고 말았다.

항일전쟁 발발 이후에 욱달부는 항일구국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의 항일 선전사업에 참가하였다. 이때 그는 전선으로 달려가 항일전사들을 위로하고,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 이사를 역임하였다.

1938년 겨울에 남양(南洋)에 이르러 싱가포르 문화계의 항일구국 운동을 영도하면서 ≪화교주보(華僑周報)≫와 ≪성주일보(星洲日報)≫를 편집하고, 많은 정론문과 고체시를 발표하여 항일을 선전하였다.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된 후에는 수마트라로 도망가서 이름을 조렴(趙廉)으로 바꾸고 은거하였으나, 1945년 9월 17일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해방 후 백방으로 그의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1952년 중앙인민정부에서는 "민족해방 순국열사"로 추대하고 그의 고향에 정각을 세워 기념하였다.

욱달부의 일생은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지나온 행로는 복잡하면서도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애국주의자로서 조국의 재난과 민족의 비참한 운명 및 개인적인 불행을 당하여 어두운 사회제도를 향하여 대담하게 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의 틀을 벗어나 못한 평범한 지식인으로서 대중과 뜨거운 투쟁을 이탈하여 개인적인 열정에만 의지하여 혼자서 좌충우돌하였다. 그는 퇴폐주의 사상의 영향하에서 자신의 출로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변에는 늘 고민과 고독이 함께 했다.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병적인 인물이며, 그의 반항은 왕왕 소극적인 자살 방식과 변태적인 성욕의 방종을 취했다. 이로써 그의 작품에는 감상적이고 퇴폐적인 정서와 불건전한 요소가 충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욱달부는 모두 44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주요 소설집으로는 ≪침륜(沈淪)≫, ≪조라집(조蘿集)≫, ≪그녀는 약한 여자(Ta是一個弱女子)≫, ≪봄바람에 흠뻑 취한 밤(春風沈醉的晩上)≫, ≪한회집(寒灰集)≫, ≪계륵집(鷄肋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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